<백장현 칼럼>

백장현 한신대 초빙교수

[고양신문] 6월 초부터 거칠게 몰아치던 북한의 도발이 23일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예비회의에서 김정은의 대남 군사행동계획 보류 지시로 멈추었다. 지난 달 중순 북한은 탈북민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문제삼아 개성 남북공동사무소 청사를 폭파시킨 후 남북합의에 따라 비무장화된 지대에 군사력을 재배치해 6·15 선언 이전의 대결과 적대의 상태로 되돌리겠다고 위협하였다. 만일 북한이 공언한대로 남북 간 판문점 합의를 깨는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면 한국 정부도 이에 상응하는 대응조치를 할 수밖에 없기에 남북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을 게 분명하다. 따라서 김정은의 보류 지시는 판문점과 평양에서 맺은 남북 간 합의를 이행하라는 문재인 정부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개성 남북공동사무소 폭파도 자신들의 분노를 요란스럽게 표출하는 행동이었지만 남북 간 군사합의를 위반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치밀한 계산속에서 저지른 도발이었던 것이다.

김여정의 담화에 담긴 메시지

이번 달 10일에는 김여정의 조선중앙통신 담화를 통해 북미관계 관련 김정은의 메시지를 내놓았다. 김여정 담화는 외신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는데 양과 질 양쪽에서 매우 이례적이기 때문이었다. 김여정 담화는 김정은의 의중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데 A4 용지로 4매에 이를 만큼 많은 분량이다.

첫째, 북미 협상 관련 북한의 입장을 상세히 밝혔다. 김여정은 ‘비핵화 대 제재해제’라는 기존의 틀을 앞으로는 ‘적대시 철회 대 조미협상 재개’라는 틀로 고치겠다며, 최근 미국의 북한 인권문제 언급, 테러지원국 재지정 등의 사례를 들어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을 비난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에게 대북 경제제재 해제와 영변 핵단지 폐기를 다시 흥정하려는 생각을 하지 말라면서도 작년 하노이 회담에서 거래조건이 맞지 않았음에도 자신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북한 주민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 제재 해제와 영변 핵단지 폐기를 맞바꾸는 모험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여정 담화는 향후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서는 북한의 행동과 병행하여 미국과 한국의 많은 변화 즉 불가역적인 중대 조치들이 동시에 취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제제재 해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2018년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의 합의인 ‘북미 간 적대관계 청산과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체제 구축’ 등의 조치들이 북한의 행동과 병행해 실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둘째, 북미정상회담 추진 관련 북한의 입장을 밝혔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과 참모들이 언급한 북미정상회담 가능성 시사와 관련해 북미 간 심대한 이견이 존재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미국의 입장 변화가 없는 한 정상회담은 자신들에게 아무 실리가 없고 무익하기 때문에 올해는 하지 않겠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김여정 개인의 생각으로는 올해 정상회담이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지만 두 수뇌의 판단과 결심에 따라서는 달라질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 김정은의 속내는 미국의 입장 변화만 있다면 정상회담을 하고 싶다는 것으로 읽히는 메시지이다.

셋째, 미국에 대한 제안을 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부심하고 있는 대선 정국에서의 북한 도발 우려에 대해 미국의 처신에 달려있다고 공을 미국으로 넘기면서, 미국이 북한에 대해 경제적 압박을 가하고 군사적으로 위협한다면 자신들도 좌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그러면서도 김여정은 엉뚱하게 미국으로부터 독립절 기념행사를 수록한 DVD를 얻으려 한다는 것을 김정은으로부터 허락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급과 비슷한 수준의 북미 간 고위급 비밀 접촉을 하고 싶다는 메시지로 읽히는 대목이다.
 

김정은 메시지에 응답하라

문재인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내용을 이행하라는 김정은의 메시지에 응답해야 한다. 먼저 남북합의를 위반한 행위는 빠른 시간 내에 시정해야 할 것이다. 최근 상호 비방 중단이라는 남북 합의를 명시적으로 위반한 탈북민 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를 단속한 것은 신뢰 회복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또한 새로 임명된 이인영 통일부장관 후보자의 “한미공조가 필요한 일과 남북이 스스로 할 일을 구분하는 창의적 해법이 필요하다”는 발언과 임종석 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의 한미워킹그룹 개선책 언급 등도 긍정적이다. 북한 매체 ‘우리민족끼리’의 “두 사람이 한미 워킹그룹에 비판적인 말들을 한 상황이라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는 호의적 평가도 향후 남북관계 복원의 청신호이다.

미국과 북미정상회담을 하고 싶다는 메시지에도 응답해야 한다. 북핵 폐기와 병행하여 미국의 상응 조치가 행동 대 행동으로 취해져야 한다는 북한의 주장은 합리적인 것이기에 받아들여져야 한다. 6자회담의 합의문인 ‘9.19 공동성명’의 내용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는 빅딜(big deal)에 집착하는 트럼프 행정부를 설득해야 한다. 트럼프가 생각하는 빅딜은 그 내용도 불분명하지만 상호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한꺼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노딜(no deal)을 선택한 것도 북한의 영변 핵단지 폐기 정도로는 미국 내 여론을 만족시킬 수 없어 승리의 개선장군이 되고 싶은 자신의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단계적으로 합의 사항을 실천하면서 상호 신뢰를 쌓아 나가야 한다. 북한의 살라미 전술(잘게 쪼개 시간을 질질 끄는 전술)이 우려된다면 핵 폐기의 로드맵과 일정을 담보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될 것이다. 이번에 새로 임명된 외교안보팀의 적극적 역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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