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받은 땅에서 감사의 나날

고양은 나의 '제2 고향'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서 자라왔지만 내 삶의 절반 이상, 정확히 35년 동안 고양에 살고 있으니 그 깊은 정, 진한 애착을 어찌 떨칠 수 있으랴. 그래서 많은 유혹에도 애오라지에도 지금의 집을 지키고 있다. 가까운 이웃들이 무슨 바람난 사람들처럼 강남으로, 아파트로 몰려갈 때도 나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무슨 선인이라도 되는 듯이-.
이처럼 고집스럽게, 자랑스럽게 지키고 있는 내 집은 고양시 덕양구 동산동, 서오릉 뒷산아
래 숲 속에 있다. 1960년대 말 처음 기자촌 입주권을 받아놓고 주위를 살피다 마침 노송이
우거진 나지막한 언덕을 찾아내어 둥지를 마련했다. 그린벨트에 묶이기 2년 전의 일이다. 비
록 재산상의 손해가 있었을지언정 개발제한 덕택에 이곳의 녹지가 보존되어 전원생활의 즐
거움을 이어가게 된 것에 만족한다. 그런데 요즘 이 일대가 개발제한에서 풀려 곧 아파트단
지를 낀 주택가로 바뀐다고 생각하니 머지않아 다른 숲을 찾아 떠나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이곳엔 문인, 예인들이 남아 있다. 처음 주택단지를 조성할 무렵엔 방송 작가들이
주류를 이루어 방송인 촌으로 불리기도 했다. 나는 동산이름을 송현(松峴)이라 붙이고 뒷마
당에 봉야원(鳳野園)이란 현판을 붙였다. 공작새를 비롯, 금계, 은계며 칠면조를 기르고 있었
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다. 족보에 있다는 전서구(傳書鳩)를 구해 키웠는데 너무 번식이 잘
되어 오래지않아 치워버렸다.
서울 도심에서 불과 15km의 거리에 이런 낙원을 만들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서 압구
정이다, 서초동이다 강남 비싼 땅, 높은 집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조금도 부럽지 않았다. 내
가 마음의 부자이니까. 그런 자연생활이 자랑스러우니까. 신혼 때 초대받았던 신문사 동료들
이 소문을 냈다. 소나무 밑 뒷마당에 앉아 식사를 하는데 나무에서 새똥이 떨어지고 개구리
가 밥상에 올라오더라고-.
나는 어려서부터 소나무를 사랑했다. 출생지인 성북동집의 뒷동산에 가득했던 소나무의 절
경이 머리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그 아름다운 동산의 축소판을 동산리에 재현했다고
나 할까. 옛날 마을의 제사를 올렸다는 집터엔 수령 100년쯤 되는 노송이 10그루나 어우러
져 운치를 더해준다. 그래서 집 값보다는 소나무 값이 더 비싸다고 우스개 소리로 자랑하기
도 한다.
우리나라 민족성을 상징하듯 구부정하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지녔고 독특한 멋을 뽐내는
그 붉은 소나무. 한번은 그 소나무가지를 잘라내다가 공중에서 곤두박질하여 큰 부상을 입
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혹파리 탓인지 그 중의 하나가 고사했을 때는 친족을 잃은 듯 한 아
픔을 맛보기도 했다.
감사할 것이 또 있다. 200평이 채 안 되는 뜰이지만 정원 가꾸기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러
니까 부지런해 져야한다. 조금만 게으름을 피우면 마당이 엉망이 되고 만다. 나무를 사랑하
지 않고, 여기에 땀을 흘리지 않고 자연을 즐길 수는 없는 일이다.
다른 취미로 등산과 골프가 있다. 그런데 북한산이 가까이 있고 뒷산(응봉)에서도 아쉬운 대
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하기는 그 체력으로 젊은 날 에베레스트 6천5백m 캠프에까지 오
를 수 있지 않았을까. 내 건강 3훈(訓), 운동, 노동, 뇌동(腦動)은 이렇게 이곳 '복 받은 땅'
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고양과 함께 한 반평생에 감사할 뿐이다.
이 태 영
언론인, 명지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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