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형만 시인, 평생학습카페 ‘양동이’ 초청강연

생각을 나누고, 함께 낭송하고
시의 세계에 흠뻑 젖어든 시간 

'시는 만남이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는 허형만 시인.
'시는 만남이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는 허형만 시인.

[고양신문] 초가을비가 내리는 6일 오후, 원흥동에 자리한 평생학습카페 ‘양동이(대표 조홍래)’에서 허형만 시인이 독자들과 만났다. 9월 『있으라 하신 자리에』(문예바다 서정시선집)라는 ‘사랑하는 시를 엮은 앙증맞은 시집’을 출간한 시인은 ‘시는 만남이다’라는 주제로 2시간 동안 강연을 펼쳤다. 강연에는 허 시인과 함께 시를 공부하고 있는 시인들과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시 낭송가 등 10여 명이 참석했다. 

허형만 시인은 1973년 <월간문학>에 시를 필두로 동시와 시조로 등단한 원로 시인이다. 50년간 시를 쓰며 학생들을 지도했고, 오랜 세월 몸담았던 목포대학교의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비 잠시 그친 뒤』, 『영혼의 눈』, 『그늘이라는 말』 등의 시집과 『새벽』, 『따듯한 그리움』, 『뒷굽』 등의 시선집, 그리고 다수의 수필집을 저술했으며 소파문학상, 평화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등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올 6월에도 제29회 공초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은 쉽고 따듯한 언어로 감동을 전하는 한국 서정시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이날 허 시인은 시란 무엇인지, 시를 쓸 때 어떠한 자세여야 하는지, 그리고 문학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에 대해 들려주었다. 강의 진행 도중에는 관객들과 번갈아 가며 자신의 시를 낭독했다. 강연 장소를 제공한 ‘양동이’의 조홍래 대표는 “존경하는 시인을 모셔서 영광스럽다”면서 “올해 처음 평생학습카페로 지정되었는데 여러분들과 함께할 수 있는 문화공간, 마을 사랑방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행사를 기획한 고양시평생학습카페의 박정호 행복학습정원사는 “2014년 고양시가 평생학습도시로 지정된 이후 시민들이 수준 높은 강의를 학습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다”면서 “작년에는 비대면으로 몇 차례만 진행해서 아쉬웠는데, 올해 처음으로 대면으로 진행하게 되어서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강의를 시작하며 허 시인은 “시를 쓰려고 하는 이들에게 좋은 글이어서 준비해 왔다”면서 오탁번 시인의 글을 소개했다. 그의 강연을 요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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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언어를 최고 존엄으로 모시는 사람

오탁번 시인은 ‘언어를 모시다’라는 글에서 “시(詩)는 말씀 언(言)과 절 사(寺)로 이루어진 단어이다. ‘寺’는 절을 뜻할 때는 ‘사’라고 읽지만 ‘모신다’는 뜻일 때는 ‘시’라고 읽는다”면서 “시는 언어를 최고로 받들어 모시는 문학의 장르이다. 이렇게 볼 때 언어를 최고 존엄으로 모시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라고 했다.

나는 지금도 시를 쓸 때 공을 많이 들이고, 구성과 언어 선택에 애를 많이 쓴다. 작품에 딱 맞는 말, 적재적소에 적확한 언어를 찾느라 정성을 다한다. 책상에는 항상 국어사전, 식물도감, 동물도감이 있다. 시인이라면 이름 모를 꽃이라는 표현 대신에 꽃 이름을 정확하게 써 줘야 한다. 

시는 아주 사소한 사물과 정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일상의 소소한 경험에서 시가 나온다. 시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게 있다. 우리말을 사랑하고,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외래어는 쓰지 말라고 한다. 나의 ‘시인’이라는 시는 이러한 생각에서 나왔다.

‘시인은/ 언어를 모시는 사람// 시인은/ 풍경의 그늘에서/ 외로움으로 떨고 있는 언어를/ 가슴에 품어주는 사람// 시인은/ 허공에 절벽으로 서서/ 전율하는 언어를/ 눈물로 다독여주는 사람// 시인은/ 언어를 위해 촛불을 켜는 사람’ (시 ‘시인’ 전문)

시는 만남입니다

우리는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 꽃을 만나고, 별을 만나고, 오늘도 이렇게 함께 만났다. 이런 만남이야말로 소중하고 중요하다. 우리 삶에 신비로움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오늘 여러분들과 만난 것도 기적이자, 설레고 떨리는 일이다. 시를 쓰는 사람은 설렘이 없으면 시를 쓸 수 없다. 

시를 쓸 때 기본형은 ‘듣다’와 ‘보다’이다. ‘듣다’의 경우 그냥 듣는 것(hearing)과 귀를 기울여서 듣는 것(listening), 2가지가 있다.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은 사물, 즉 시적 대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성찰해서 봐야 한다. 봄까치꽃이 나에게 와서 시가 되려면, 허리를 구부리거나 무릎을 꿇고 가까이 들여다보면서 대화를 나눠야 한다. 그리고 그때 보이는 색감, 햇살 등 세세한 것을 알아채야 한다. 이게 시를 쓸 때의 만남이다. 50년 동안 시를 써온 내 경험을 압축하자면 ‘시는 만남’이다.

‘이태리 맹인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눈먼 가수는 소리로 느티나무 속잎 틔우는 봄비를 보고 미세하게 가라앉는 꽃그늘도 본다. 바람 가는 길을 느리게 따라가거나 푸른 별들이 쉬어가는 샘가에서 생의 긴 그림자를 내려놓기도 한다. 그의 소리는 우주의 흙 냄새와 물 냄새를 뿜어낸다... 영혼의 눈으로 밝음을 이기는 힘!...’ (시 ‘영혼의 눈’ 일부)

이 작품은 맹인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의 노래를 수십 번 듣고 쓴 시다. 나의 ‘영혼의 눈’은 맑고 깨끗하게 닦여 있는가. 이것이 나의 하루를 시작하는 첫 물음이다. 매일 안경알을 닦듯 영혼의 눈도 잘 닦여 있어야 새로운 하루, 새로운 우주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 매 순간 순간, 새로운 ‘만남’은 항상 가슴이 설렌다.

문학은 사랑입니다

세상은 열려 있는 책, ‘오픈 북(open book)’이다. 세상은 눈뜬 자에게만 보이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책이다. ‘눈뜬 자’란 관찰하고 성찰하는 사람을 말한다. 시를 쓰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심과 호기심이다. 눈뜬 자가 되기 위해서 늘 마음속에 품고 가까이해야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문학’이다. 

문학(文學)의 ‘문(文)’자는 본래 사람의 몸에 심장을 그려 넣은 상형문자이다. 즉 죽은 사람의 가슴에 심장을 그려 넣음으로써 부활을 기원하는 의식의 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글자로서의 기록이 아닌 주술적 그림이었다는 뜻이다. 모든 감정과 애원이 듬뿍 담긴 그림으로 인간의 모든 기록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문(文)’자 본래의 의미를 가장 잘 전달하는 것은 역시 시다. 시를 쓰면 우주의 삼라만상을 다시 보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시를 사랑하고 시를 읽어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문학을 할 수가 없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몇 년 전 교보문고 광화문 글판에 걸려있던 ‘겨울 들판을 거닐며’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사람들은 겨울 들판을 보면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들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겨울 들판으로 직접 들어가 보면 우리는 그곳에서 파란 새싹들이 돋아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생명이 존재하고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러므로 사물이나 사람의 단면만을 보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이처럼 ‘시’란 사소한 것에서 의미를 찾고, 죽어 있는 것에서 생명을 발견하는 것이다.

양동이와 평생학습카페 덕분에 오늘과 같은 만남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여러분들의 평화를 기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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