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주산성에 숨은 보석같은 이야기를 찾아서 [연재순서]

삼국시대~조선시대, 덕양산과 행주강   
개화기~경제개발시대, 숨 가쁜 역사 
평화의 염원 품은 생태·감성 공간으로   

덕양산에서 고양 땅과 한강, 서울 북서부 일대를 조망하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진강정. 
덕양산에서 고양 땅과 한강, 서울 북서부 일대를 조망하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진강정. 

한강 길목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 덕양산 
북한산과 손 맞잡은 한양도성의 외사산 
세곡선·상선 북적이던 조선시대 행주나루 

행주산성, 하면 떠오르는 첫 이미지는 당연히 행주대첩과 권율 장군이다. 국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이 위태롭던 임진왜란 초기, 승승장구하던 왜군의 기세를 물리치고 전쟁의 국면을 전환시킨 결정적 승전이 바로 행주대첩었으니 청사(靑史)에 길이 기억됨이 당연하다. 

그러나 행주산성, 그리고 행주산성이 자리한 덕양산은 행주대첩만으로 의미를 국한하기에는 너무나도 다채로운 이야기를 품고 있다. 덕양산에 올라 행주대첩과 권율 장군만을 만나고 오는 것은 마치 한식 명인이 차린 한정식상을 받아들고 메인 요리만 맛보고 오는 것과 같다. 상 위를 가득 채운 찬 하나하나마다 고유의 개성과 가치가 담겨있으니, 이왕이면 그 모든 것들을 골고루 맛보아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하지만 행주산성과 덕양산, 그리고 덕양산 아래 행주강이라 불렸던 한강 수변 일대는 고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역사의 다채로운 장면들이 겹겹이 퇴적된 보물창고라 할 수 있다. 이제부터 그 빛나는 보물들을 지도에 숫자를 매겨가며 개괄해보자. 

덕양산과 행주산성, 행주동 일대의 역사, 문화 탐방 포인트. 빨간색이 이번 호 기사에 소개된 장소다. 
덕양산과 행주산성, 행주동 일대의 역사, 문화 탐방 포인트. 빨간색이 이번 호 기사에 소개된 장소다. 

북한산과 한강이 한눈에 조망되는 덕양산 

덕양산과 행주산성의 가치를 살피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덕양산 정상에서의 전망(1)을 만나봐야 한다. 덕양산은 높이가 125m로서, 산 높이만 보자면 작은 언덕에 불과하다. 그러나 덕양산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이 작은 언덕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적 가치가 얼마나 탁월하고 소중한지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동남쪽으로 한반도의 중심 문명을 꽃피운 젖줄인 한강(2)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가로질러 고양땅을 향해 유유히 흐르고, 동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태고(太古)부터 오늘날까지 한반도 중심의 진산(鎭山)으로 숭앙받고 있는 북한산(3)의 장엄한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북한산에서 발원해 덕양구의 마을들을 차례차례 지나온 창릉천(4) 물줄기가 덕양산 아랫자락을 휘감고 한강으로 흘러든다. 

우리 역사의 근간인 북한산과 한강, 그리고 그 둘을 이어주는 창릉천. 이 장대한 파노라마가 한눈에 조망되는, 작지만 큰 산이 바로 행주산성이 자리한 덕양산인 것이다. 덕양산의 이러한 장소적 특성을 염두에 두어야만 이제부터 짚어볼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이 비로소 입체적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덕양산 정상부에 우뚝 서 있는 대첩비각(왼쪽)과 신행주대첩비.
덕양산 정상부에 우뚝 서 있는 대첩비각(왼쪽)과 신행주대첩비.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행주산성의 역사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행주산성이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군사시설이 아니라는 점이다. 서해바다에서 조강(祖江)을 지나 드넓고 비옥한 서울 땅으로 들어서는 길목인 한강 하구는 역사가 기록되기 훨씬 이전부터 한반도의 중원을 차지하려는 세력들이 끊임없이 각축전을 벌이던 장소였다. 또한 세력과 세력이 충돌할 때마다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가 바로 서울을 목전에 둔 마지막 관문인 덕양산이었다. 권율 장군 역시 같은 이유에서 조선의 명운을 건 전투 장소로 행주산성을 선택했던 것이다.    

2019년에는 덕양산 정상 바로 아래 정상부 능선에서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축산성(5)이 확인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동안 행주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포곡식 토축산성(包谷式 土築山城)이자 행주대첩 구국의 성지로만 인식됐었는데, 산정 바로 아래에서 테뫼식 석축산성(山頂式 石築山城)이 발견되며 일반인들에게도 행주산성의 역사에 대한 감각을 먼 과거로 이동시켜주었다. 행주산성 나들이를 한다면 정상 서남쪽 계단 아래 숨은 석축산성 발굴지와 동쪽 사면을 따라 이어진 한가로운 토성길(6)을 걸으며 역사적 상상력을 펼쳐보기를 바란다. 

행주산성 정상부 경사면에서 모습을 드러낸 삼국시대 석축산성 유적. 
행주산성 정상부 경사면에서 모습을 드러낸 삼국시대 석축산성 유적. 

기황후 전설 전해오는 행주기씨 유허비 

덕양산에는 고려시대의 역사 한자락도 만나볼 수 있다. 바로 토성 성문지(城門址) 바로 아래에 자리한 행주기씨 유허비(幸州奇氏 遺墟碑)(7)다. 오늘날 기(奇)씨 성을 가진 이들은 전국적으로 채 3만 명이 되지 않지만,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사칠논변(四七論辯)을 벌였던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을 비롯해 많은 학자와 충신을 배출한 명문가다. 특히 고려시대 말에는 원나라 혜종의 황후가 된 기황후(奇皇后)의 후광으로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세도가로 군림하기도 했다. 행주 기씨 가문의 뿌리가 되는 곳이 바로 덕양산 기슭 행주마을이다. 행주기씨유허비 부근에는 기씨 선조들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기감천(奇甘泉)이라는 작은 샘도 있다.  

행주기씨 유허비. 
행주기씨 유허비. 

한양도성 호위하는 서쪽 꼭지점 

새로운 왕조를 연 조선은 개국과 함께 한양으로 천도하며, 한양 땅 사방의 주요 산들을 왕도를 호위할 내사산(內四山, 백악산-인왕산-남산-낙산)과 외사산(外四山, 북한산-덕양산-관악산-용마산)으로 삼았다. 이 중 북쪽 외사산에 해당하는, 가장 높고 우뚝한 북한산이 왕도의 진산(鎭山)이 됐다. 진(鎭)자는 ‘무언가를 지그시 눌러놓는다’는 뜻이다. 붓글씨를 쓸 때 종이가 움직이지 않도록 잡아주는 묵직한 누름돌을 문진(文鎭)이라 부르듯, 북한산의 위풍당당한 산세를 우러르며 조선의 수도 한양이 오래도록 흔들림 없이 평안하기를 빌었던 것이다. 

그 북한산을 가장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서쪽 외사산이 바로 덕양산이다. 덕양산(125m)은 관악산(632m), 용마산(349m) 등 나머지 외사산들에 비해 높이가 턱없이 낮지만, 주변에 너른 들녘을 거느리고 있고, 서해바다를 향해 트인 한강 하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외사산으로서 모자람이 없는 입지였다.  

자세히 찾아보면 덕양산에도 누를 진(鎭)자가 들어간 장소가 있다. 행주산성 남동쪽 언덕받이에 자리한 진강정(鎭江亭)(8)이 그곳이다. 이름 그대로 커다란 홍수나 수해 없이 한강물이 유순하게 흐르기를 비는 마음이 정자 이름에 담겼다. 진강정은 현대에 지어진 정자이지만, 덕양산의 지리적 중요성을 방증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삼국시대 석축산성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들. 
삼국시대 석축산성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들. 

행주나루터 자리에 세워진 행호정 

물길이 이동과 물류 유통의 고속도로 역할을 했던 조선시대, 행주나루는 곡창지대였던 호남과 호서지방에서 서해바다를 거슬러 올라온 세곡선과 소금과 새우젓 등을 싣고 온 상선들이 북적이는 포구였다. 한강 하구는 서해 조수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강물의 흐름이 바뀌었기 때문에 한강 하구의 가장 큰 나루터인 행주나루를 기착지로 삼았던 것이다. 

과거 행주나루터가 있었던 위치는 행주산성역사공원에서 행주대교로 가는 산책로 중간쯤으로, 최근 행호루(杏湖)(9)이라는 정자가 새롭게 세워져 방문자들에게 아름다운 강변 풍치를 선사한다.

과거 행주나루터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석비 조형물.  [사진=이명혜]
과거 행주나루터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석비 조형물.  [사진=이명혜]
한강 하구와  행주대교 풍광이 시원하게 조망되는 행호루. 
한강 하구와  행주대교 풍광이 시원하게 조망되는 행호루. 
행주산성 토성 구간. 임진왜란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장소다. 
행주산성 토성 구간. 임진왜란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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