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방학’

송원석 문산고 교사
송원석 문산고 교사

[고양신문] 애통한 슬픔이 검은 구름이 되어 눈물을 흘립니다. 알지 못하는 이들의 많은 죽음이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미안함으로 마음을 적십니다. 냉장고 가장 안쪽에서 묵묵히 주인을 기다리던 묵은지가 막걸리를 부릅니다. 어느새 막걸리 2병이 사라지고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5월의 그때로 떠나고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을 나누고 삶의 지향을 공유하는 모임들이 있습니다. L.I.H는 저에게 그런 모임입니다. 교직에 들어와 참교육 운동을 함께 하며 알게 된 지 20년이 되어가는 6명이 사적으로 깊이 가까워진 건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20년 동안 적어도 월 1회 이상은 만났던 사이라서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교육 운동을 매개로 만남을 이어오다 보니 또 다른 ‘나’를 내어놓기엔 거리가 있었습니다. 물론 저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요. 

7년 전 여름, 여느 때와 같이 행사를 마치고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마무리하던 우리는 동시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늘 맨 앞에만 서 있는 우리 6명이 뒷자리에 앉을 날이 올까?’라고 말이지요. 15년 이상 학교를 퇴근하고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해야만 했던 중년의 그들에게 그날은 느낌표 말고 마침표가 절실했었나 봅니다. 

“옥상옥(屋上屋)일 수도 있지만 스트레스 없는 모임이 될 거니까 월 1회 무조건 보는 걸로.”
“분기별로 책 1권씩 읽어도 좋을 것 같은데.”
“1년에 1~2번은 여행도 가야겠지.” 

1년 치 모임 일정이 단숨에 마감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난관. 모임 이름 정하기. 영어교사인 K가 L.I.H를 제안합니다. ‘Latte is Horse(L.I.H)’. 학교의 꼰대 문화와 맞서 싸웠던 그들이 이제 “나 때는 말이야”를 입에 달고 살고 있으니 Latte is Horse(L.I.H)는 ‘완벽한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한 완벽한 주문이었습니다. 

※ 친절한 송 선생
꼰대 : 아버지나 교사 등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켜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쓰던 은어였으나 근래에는 자기의 구태의연한 사고 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꼰대질을 하는 직장 상사나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변형된 속어이다. (위키백과) 
Latte is Horse(L.I.H) : 권위적이고 말이 많은 중년들을 향하여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은어. “나 때(Latte)는 말(Horse)이야”를 영어로 표현. (다음 게시판)

특별히 발제자 없이 진행해도 우리의 독서 토론은 막힘이 없었습니다. 어차피 모두 안 읽고 입만 가지고 왔으니까요(^^). 모임 결성 이후 첫 번째 여행지였던 춘천(K 아내의 고향)을 계기로 ‘전설의 고향’이 아닌 ‘아내의 고향’을 여행 컨셉로 잡았지만 연이은 부부싸움으로 중단. 그래도 불굴의 L.I.H는 다시 5년 전 산티아고를 함께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결정 당일 바로 개설한 여행통장이 그들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산티아고를 가면 “나는 그게 너희들과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저의 말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장소는 별 볼이 있는 ‘몽골’로 변경. 그러나 코로나19. 현재까지 돈은 쌓여만 가고 그사이 멤버 중 1명은 태국 국제학교로 파견을 나갔습니다. 그들의 여행은 부활할 수 있을까요? 

옛 전남도청 모습.
옛 전남도청 모습.

3년 전 L.I.H는 중단된 여행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1박 2일 일정으로 전라도 광주를 다녀왔습니다(태국으로 파견 나간 1명, 개인 일정으로 불참한 1명. 결국 4명만 갔다 왔습니다). 광주시 교육청이 진행하는 5.18 민주화 운동 교사 직무 연수를 뜻을 모아 함께 신청하게 되었고 복원 중인 옛 전남도청, 헬기 사격의 증거가 가득한 전일빌딩 등을 아주 오랜만에 다시 방문했습니다. 광주지역 연극패인 ‘토박이’의 5.18 관련 연극을 본 후에는 편의점에 들러 소주 한 병과 종이컵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소인 망월동으로 향했지요. 대표해서 윤상원 열사 묘소에 소주 한잔 가득 채워 올려드렸습니다. 

올라오는 차 안에서 L.I.H는 ‘나는 전남도청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을까?’, ‘우리가 지켜야 할 이 시대의 전남도청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잠겼습니다. 운전자를 제외한 모두의 눈도 잠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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