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호의 사람도서관 (6) 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근대뉴스 번역가로 활동 중인 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
근대뉴스 번역가로 활동 중인 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

[고양신문] 8월은 1945년 일제로부터 우리나라가 독립을 맞이한 달입니다. 100년 전 대한민국의 모습과 일제강점기 시절 시민들의 일상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떤 고민을 안고 살아갔는지 가늠하고자 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에게 인터뷰를 부탁드렸습니다. 송종훈 대표는 현재 '근대뉴스' 번역가로 활동 중인 고양시의 이웃입니다. 

“ 100년 전에도 사람 사는 모양새는 매번 비슷합니다.
어려운 시기에도 서로를 돕고 사는 작은 영웅들, 큰 시민들의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통일이라는 게 거창한 게 아니라 시민들이 이 땅을 자연스레 수학여행처럼 오가듯,
일상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습니다.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위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에게 명예란 무엇인지 질문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 현재 발행하는 인터넷신문 '근대뉴스'에 대해 소개 부탁드려요.

'근대뉴스'는 1900년대 초 대한제국 패망을 전후해 발행된 당시의 신문들(신한민보, 대한매일신보, 조선ㆍ동아일보, 그리스도신문)을 취급하는데, 한자 등이 많고 지금과 다른 한글, 다른 시대상황으로 그 원문을 요즘 사람들은 읽기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자료와 기록은 남아있으니, 이걸 번역해서 요즘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만들고, 후세에 기록으로 남기고자 아카이빙을 하는 작업입니다.

■ 근대뉴스를 번역하면서 인상적인 기사들이 있나요.

100년 전에도 요즘처럼 홍수가 크게 있었고, 사람 사는 모양은 매번 비슷합니다. 그 어려운 시기에도 서로를 돕고 사는 작은 영웅들이자 큰 시민들의 이야기,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고 현재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영감을 주는 그런 기사들이 떠오릅니다.
예를 들어 100년 전 8월에는 어마어마한 홍수로 인해 조선의 서선(서쪽 조선 : 평안도, 황해도, 인천 등)에 엄청나게 많은 이재민들이 발생했습니다. 그때 지금으로 말하면 초등학생들이 용돈을 모아 기부했던 이야기, 독립운동으로 감옥에 갇혀있던 분들이 출소하고 노역으로 받은 돈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차비만 빼고 기부했던 이야기 등이 있습니다. 대단하죠? 

그리고 고양시 관련된 기사도 무척 많은데, 행주산성 기공사(권율장군 사당 이름)를 1930년도에 개축할 때 성금을 모았던 고양시 사람들의 이름과 주소, 액수까지 기입된 1550여 명의 명단을 기사에서 번역해 엑셀로 제가 지금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기부된 내용이 신문에 실리는데 기부자 이름이 한자에다 띄어쓰기도 없이 세로줄로 적혀 있다 보니 번역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다만 이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을 내가 번역해서 한번 밝혔고, 신문에 실어 발행하면서 두 번 밝혔고, 독자들이 이걸 읽었을 때 적어도 세 번은 이 사람들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이어지잖아요. 그 자체로 참으로 기쁩니다. 

100년 넘은 일산초등학교도 그랬지만 당시 학교가 없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도 가르칠 수가 없으니 동네유지들이 돈을 모아 학교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국적으로 많이 나옵니다. 1920년대 고양시 기사를 찾아 책으로 만들었고 30년대 고양시의 일상도 작업을 완료했지만 예산 등의 문제로 책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는 다양한 고양시민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종종 후대와 후손들이 자기 할아버지나 가족을 찾다가 제가 발행한 신문기사에서 그 이름을 찾을 때가 있어요. 생전에 힘든 처지에도 누군가를 크게 도왔던 내용의 기사들을 통해 선대의 좋은 행적과 명예가 후대까지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매일 기사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1920년대 고양시 기사들 모음집
1920년대 고양시 기사들 모음집

■ 신경을 써서 시민들에게 번역하고 전달하려는 기사가 있나요.

남북통일이 되었을 때 북한을 어떻게 소개할까 이런 고민을 자주 합니다. 지금 북한의 어려운 실황을 남한과 비교하고 반복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분단 이전 남한과 북한이라는 구분이 없었을 때 당시 주민들의 삶과 일상을 소개하는 일이 더 의미있다 생각합니다.

목포상업전수학교 학생들이 강화도를 거쳐 평양, 신의주, 중국 봉천(지금의 심양), 여순(안중근 의사가 돌아간 여순감옥이 있는 곳)으로 수학여행을 갔던 이야기, 평양에 있는 평양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경성, 강화, 인천을 거쳐 경주까지 수학여행을 왔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남북한을 포함한 전국팔도를 56일 동안 4인 1조가 되어 마라톤을 하는 대회에서 양정고등학교(지금의 서울 목동에 위치, 손기정 선수 졸업) 학생들이 우승했다는 낭만적인 이야기도 나와 있죠. 엄마의 할머니가 과거에는 남한과 북한을 오가며 수학여행을 갔었는데 통일이라는 게 이처럼 거창한 게 아니라 시민들이 이 땅을 자연스레 수학여행 가듯 오가는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일이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습니다.

■ 오랜 시간 신문기사를 통해 접하게 된 100년 전과 오늘날은 어떠한 공통점과 차이가 있을까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힘든 사람은 변함없이 힘들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약자들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모습 역시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여전히 희망은 이어지고 있다는 점 역시 비슷합니다. 힘든 사람들끼리 어려운 사람들끼리 돕고 사는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언론이 중요합니다. 서로를 돕고 새로운 대안을 찾고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의미와 가치를 위해 어려운 처지에도 자신들의 일을 해내고야 마는 시민들의 이야기가 좀 더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수많은 100년 전 기사를 번역하고 또 오늘날을 살아가는 저에게 혹여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케 하는 일등공신이 누구냐 묻는다면 ‘독립운동가들이 민족의 항생제 역할을 한 것 맞다. 하지만 당시 인구가 1700만 명이었는데, 다들 해방을 위해 만주로 넘어가 항일운동을 이어갔으면 비어버린 영토는 결국 일본 땅이 되었을 것이고, 전부가 친일을 했다면 역시나 일본땅이 되었을 것이다. 그 어려운 시기에 크게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 땅위에서 온갖 모욕과 슬픔 속에서 모진시기를 거쳐냈기 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땅에 살아가고 이 땅을 견대냈던 사람들로 인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이어져왔다’ 저는 이렇게 말 할 겁니다.

과거에는 아무래도 독립운동가, 의열단, 남녀노소 구분 없이 구국을 위해 애썼던 분들의 이름과 이야기가 기사에 많습니다. 의열단 구성원의 이름은 당시 보안유지를 위해 자료를 거의 남겨두지 않는데 관련 문건이 있으면 정성을 다해 번역하였고, 당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수많은 운동가의 이름과 내용 역시 번역해 기사뿐만 아니라 책으로 남겨두었습니다. 

해방 되고 나서 6ㆍ25전쟁을 겪으며 당시 부족한 인력 등의 문제로 군인, 경찰 등을 구하려다 보니 과거에 친일했던 사람들을 다시 끌어 쓰는 문제까지 생겼죠. 너무나 혼란하고 안타까운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후 정권의 영웅이나 구국을 했다는 위인들이 부정부패를 일삼은 걸 보면 오랜 시간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눈에 담고 살고 있는 저에게는 친일이냐 아니냐 보다는 그래서 그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훨씬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송종훈 대표가 번역한 자료들을 올리고 있는 인터넷 아카이빙신문 '근대뉴스' 홈페이지 화면.
송종훈 대표가 번역한 자료들을 올리고 있는 인터넷 아카이빙신문 '근대뉴스' 홈페이지 화면.

■ 100년 전 기사가 종종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말씀하셨는데, 기사들이 무어라 하는지요.

‘내 이야기를 좀 알려 달라. 그래서 다시 이 땅에 이런 아픔이 없게 해 달라’ 라는 말이 들려옵니다. 일제 강점기 등 내 어려운 이야기를 통해 다시는 후손들이 이런 아픔이 없기를 전달해달라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일제강점기라 해서 꼭 일본한테만 핍박을 받은 건 아닙니다. 당시 소작인들의 처지가 실린 기사들을 읽어보면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양반들, 지주들의 핍박과 모진 일들 역시 당시 시민들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당시 그 소작인들의 기사를 읽어보면 저라도 들고 일어났을 것 같습니다. 그 기사를 보면 너무나 억울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조선이 망한 건 밖으로 보면 비인간적인 세계 열강의 제국주의와 일본의 야욕, 안으로 보면 양반, 지주 등 기득권의 수탈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식민지가 아니었으면 조선은 프랑스나 영국, 미국들 또 다른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을 겁니다.

항상 당시 백성들, 시민들은 늘 고달팠습니다. 그러고 보면 세종대왕이 성군이라는 건 양반들에게나 성군이었던 거지 백성들에게까지 성군이었겠습니까? 세상의 원리는 비슷합니다. 삶이란 늘 어렵고 곤혹스럽습니다. 3%의 소금 때문에 바다가 얼지 않는다 하죠. 삶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97%의 불행이 있어도 3%의 행복과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죠.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3%의 소금 때문에 얼지 않는 바다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걸 100년 전 기사를 통해 저는 매번 깨닫습니다.

송종훈 대표가 자료를 정리하고 원고를 쓰고 있는 모습
송종훈 대표가 자료를 정리하고 원고를 쓰고 있는 모습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정말 미래가 없을까요?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시민들은 옛날 역사를 보면서 그 어려움과 고통을 어떻게 함께 나누고 극복하였나, 어떻게 지나왔나를 알고 싶어 하는 거지 역사적 사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친일파의 청산이 쉽지 않아 문제라고 생각이 든다면, 일본 강점기 시절에 어느 누가 나쁜 짓을 했는지를 주로 드러내기보다 당시 어떤 시민들이 누구를 도왔고 힘든 시절을 어떻게 이겨냈는지를 주로 다뤄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명예란 무엇인지 질문할 수 있게 해야 할 것 같아요. 가해자나 피해자를 구분해 처벌하고 위로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시민들 한명한명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게, 지금보다 서로가 더 명예롭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게 만드는 방식이 사회 에너지의 총량을 확장시키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질책하는 건 사회를 축소시키는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요즘에는 부쩍 듭니다.

■ 이 일을 꾸준히 지속 할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일까요.

일단은 내 팔자란 생각이 가장 먼저 듭니다. 이 일을 하려면 한자를 많이 알아야하는데 천자문을 가르친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옛날 신문의 작은 글자와 한자들을 오래 쳐다보아야 하니 나이에 비해 시력이 좋아야 합니다. 그리고 타자도 빨리 쳐야 합니다. 타자친 지는 벌써 45년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일을 해야겠다는 내 마음, 이 기록을 사람들에게 남겨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늘 저에게 묻습니다.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돈은 벌어요?” 그래서 전 항상 고마운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가족이요, 두 번째는 후원자이자 친구이자 후배인 현철호라는 지인입니다. 이분들에게 큰 감사를 드리며 혹여 나의 이 작업이 나중에 큰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될 때 모든 사람들은 이 분들한테 감사해했으면 합니다.

■ 송종훈 선생님의 기사가 100년 후 시민들에게 읽힌다면 그 기사 안에는 어떤 내용들이 들어있을까요.

사실 지금 이 일에 대해 걱정을 조금하고 있어요. 내가 혹시나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게 아닌가 하고. 그러나 최근 빅데이터나 아카이빙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점점 생겨나면서 지금의 제 작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100년 후 누군가 제 이름을 기사에서 본다면 ‘참 희한한 사람도 있었네’라고 생각해주면 좋겠습니다. '근대뉴스' 기사를 검색해서 자기 할아버지 이름을 찾았다고 고맙다고 연락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그런 식으로 제 이름도 후대나 먼 미래의 사람들에게 기억되길 작게나마 소망합니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