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 작가
이인숙 작가

[고양신문]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며칠 전 지인들과 함께 효창공원에 가게 되었다. 백범 김구선생의 묘에 참배하고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묘와 아직도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의사의 가묘가 있는 삼의사묘를 참배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안장된 묘역도 있었다. 안중근의사와 애국지사 7인을 모신 의열사는 거미줄만 무성한 채 오랫동안 닫혀 있다가 일반에게 개방된 지 몇 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이분들을 모신 곳이 국립묘지가 아니라 시립공원으로 되어 있을까.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으며, 윤봉길의사는 상해 홍구공원에서, 이봉창의사는 일본왕에게 폭탄을 던지고 감옥에서 순국하신 일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백정기의사도 윤봉길의사와 함께 거사를 하기로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윤봉길의사 혼자 폭탄을 던졌지만 역시 체포되어 순국하신 분이다. 이분들 외에도 조국을 위해 자신의 한 몸과 가족들까지 희생하신 분들이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을 모신 묘역이 너무 작고 초라했다. 공원이라는 이름도 그렇고, 묘소 옆에는 효창운동장까지 있어서 애국지사의 묘역으로는 격에 맞지 않았다.

  지난봄에 갔던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위풍당당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현충원에는 일제 때 항일투쟁에 몸 바치신 애국지사들도 모셔져 있지만, 주로 전직 대통령들과 고위 장성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이 안장돼 있다. 또한 식민지 시절 앞장서서 친일행위를 했던 인사들, 독립군을 잡고 애국지사들을 고문하던 만주군 간도 특설대 출신, 친일 경찰 출신들도 적지 아니 누워 있다. 그런 현충원의 위세에 비해 여기는 너무 초라했다. 우리 후손들이 이분들을 기리는 정성이 이것밖에 안 되는가 싶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식민지 조국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이렇게 홀대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삼의사묘(안중근의사의 가묘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묘)
삼의사묘(안중근의사의 가묘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묘)

 착잡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쉬고 있는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귓가에 울리는 소리에 소스라쳤다. “충용한 제국 신민 여러분. 제국이 재기하여 반도에 다시 영광을 누릴 그날을 기다리면서 은인자중 맡은 바 고난의 항쟁을 이어가고 있는 모든 제국 군인과 경찰과 밀정과 낭인 여러분……” 이게 무슨 소릴까 놀라고 있는데, 한국의 지하비밀단체인 ‘조선총독부 지하부 소속 유령해적방송’이라는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제 때가 왔습니다. 이 땅을 다시 식민지로 만들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얼빠진 조센징들은 이 땅을 대일본 제국에 바치지 못해 안달하고 있습니다. 그 작태가 얼마나 귀엽습니까?” 그러니 곳곳에 숨어 있던 친일파들, 조선인의 탈을 쓴 밀정과 낭인들은 총집결하여 조선의 재식민화에 앞장서라는 총독의 목소리는 신이 났다. 우리가 다시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건가, 놀라고 어리둥절한 가운데 다른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여기는 환상의 상해임시정부가 보내는 주석의 소리입니다. 주석각하의 삼일절 담화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임시정부의 주석은 암살의 방아쇠가 당겨지고 가죽조끼가 울고 주재소가 불타오르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잠시 감상에 젖더니, 갑자기 울분에 찬 목소리로 비분강개하였다. “총독의 망령이 조선을 뒤덮고 있구나!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는가! 조선인들은 뭘 하고 있는가!” 질타하는 주석의 목소리가 분노에 떨렸다. “온 백성이 떨쳐 일어났던 기미년의 거사를 잊었는가? 모두 깨어 일어나라! 일어나서 저 흉악한 가짜 총독을 끌어내라! 우리가 피 흘려 지킨 이 땅을 다시 왜놈들에게 넘겨줄 것인가? 저놈을 끌어내라!” 목소리는 어느덧 쩌렁쩌렁 울렸다. “봉오동에서 청산리에서 승리를 이끌던 장군과 병사들, 함께 싸우다 죽어간 동지들, 이토를 겨누던 총구가 운다! 오오, 내 총칼이 운다!” 주석의 목소리는 어느덧 흐느낌으로 변했다. 주석의 흐느낌에 내 어깨도 들먹였다. 흑흑 느끼다가 “왜 그래?” 하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더위에 지친 어느 늦여름의 백일몽이었다. (최인훈 소설 <총독의 소리>, <주석의 소리>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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