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모임 중독자의 고백 - 『일본의 굴레』

오랫동안 일본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로 여겨졌던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오랫동안 일본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로 여겨졌던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고양신문] 2023년 8월 24일, 일본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핵발전소의 오염수를 방류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와 일본 국민의 반대를 무시한 채, 정화를 거쳐 안전하다는 이유로 한 달 가까이 방류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강한 의지와 우리나라 정부의 ‘과학적 문제는 없지만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모호한 입장 덕분에 벌어진 결과다. 엄청난 액수의 처리 비용 때문이라지만 이렇게 허술하게 대응하고 결정할 일인가. 노벨화학상 수상자를 배출할 정도로 기초과학이 탄탄한 일본이라면, 오염수가 아니라 진짜 안전한 처리수임을 왜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이지 않는 것일까. 안하는 것일까, 못하는 것일까. 일본의 진짜 속내와 일본 태도에 동조하는 우리 정부의 진심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을 이해하는 데 『국화와 칼』이라는 일본 문화 보고서는 필수다. 그러나 이 책은 어디까지나 미국 정부를 위한 일본 문화 분석 자료다. 추후 대중을 위해 첨언을 하여 출간하긴 했지만, 애초 2차 세계 대전 종식을 목표로 전쟁 상대국을 전략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쓰여진 문서다. 꽃처럼 친절한 미소 뒤에 칼을 숨기고 있는 일본을 무너뜨릴 방도를 찾기 위해서. 하지만 2차 대전이 끝난 지 78년. 일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한 게 아닐까?

태가트 머피의 『일본의 굴레』.
태가트 머피의 『일본의 굴레』.

쓰쿠바대학 도쿄캠퍼스에서 국제 정치 경제학 교수로 재임했던 태가트 머피의 『일본의 굴레』를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으며 읽게 된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시의적절하게 추천해 준 동네친구 메텔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여러모로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의 정치사회 판과 유사한 일본. 그 중심에는 핵무기로 일본을 무력화시킨 미국이 있다. 1955년까지 미군정 아래 정치개혁을 한 일본은 냉전 시대에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킬 수 없다는 미국의 욕망으로 좌지우지되었다. 일본의 보수주의 자, 반공주의자들과 손을 잡은 미군정은 일본을 전범국가가 아니라 원폭 피해 국가로 만들었다. 헌법을 만드는 등, 정치는 미국이 자리잡게 해줄 테니, 일본은 원폭 피해로 인한 경제 발전에나 힘을 쏟으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러한 10년의 실험은 1953년 한국전쟁 종료 후 미국이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적용하면서, 일본 정치 경제의 흐름을 우리나라가 그대로 쫓아가는 결과를 만들었다고 보인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우리나라의 경우 한반도가 위아래로 나뉘어 미국과 동맹을 유지한 채 강한 군대를 키워 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나라를 진짜 강하게 만들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반공으로 먹고사는 이들만 부유할 뿐이다.

일본은 미군정과 미동맹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신념이 있다.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믿음이다. 어쩌면 핵 오염수 방출 결정에도 이런 신념이 깔려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물을 먹어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 혹시 몇 년 후 암이 발생해도 그건 오염수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정화기술은 완벽하다는 등의 믿음. 수많은 과학자들이 사실은 경제적 이유 때문이라고 하는데도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괜찮을 거라는 믿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오염수 방류 결정에 찬성할 경우 우리나라의 실익을 강조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봐도 불안만 가중될 뿐 이익은 못 찾겠다. 정부 관계자들도 우리나라 입장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일본을 옹호하기 위한 친일 행위라고 규정지을 수도 없다. 그들은 그냥 믿는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우리는 안전할 거라는 믿음. 과학은 현재까지의 증명이라고 주장해도 과학을 무조건 믿으라는 주장은 그들의 뇌구조에 그것이 옳다는 생각이 깊숙이 박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김민애 출판편집자
김민애 출판편집자

수년 후 ‘우리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라는 변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때는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정도로 대답할 게 뻔히 보인다. 믿고 싶은 대로 보이는 병에 걸린 게 분명하다. 조만간 『한국의 굴레』가 출간될 것으로 조심스레 예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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