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신문]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날씨에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가을이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지난 여름의 지루한 장마와 무더위도 이젠 언제 적 일인가 싶다. 그러고 보니 여름의 끝자락을 화려하게 장식하던 능소화도 오간데 없고 어느새 코스모스, 쑥부쟁이 같은 들꽃들이 계절이 바뀐 것을 알려주고 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더니(화무십일홍) 과연 시간과 계절 앞에 모든 사물들은 이렇게 자신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들을 내어놓고 홀홀히 떠나간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말은 종종 “10년 가는 권력 없다”는 말과 같이 쓰인다(花無十日紅 權不十年). 세월 앞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의미겠다. 한때의 미모나 막강한 권력도 결국 세월 앞에서는 한낱 티끌 같은 존재인 것이다.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양귀비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했던 진시황도 역시 달이 차면 기울 듯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의 스토리는 한국 정치사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인 조봉암을 사형시키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 시민들 200여 명을 죽이면서까지 권력을 지키려 했지만 결국 쫓겨나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했다. 

민주정부를 군홧발로 짓밟고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만들고 공포정치를 통해 종신집권을 꿈꿨지만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민주화를 부르짖는 수많은 광주 시민을 학살하면서 권력을 잡았던 전두환 역시 87년 6월 시민항쟁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독재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지만 이 땅의 민중들은 끝내 그 억압을 뚫고 이 땅의 민주화를 이루어냈다. 

세월호 참사 대응과정에서 나타난 무능과, 자신의 측근들에 의한 국정 농단을 방치한 박근혜 정부는 촛불시민들의 심판을 받아 물러났다. 아직도 많은 시민들은 2016~17년 겨울의 그 추웠던 광화문 광장을 기억할 것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전국 각지에서 올라왔던 시민들은 그 겨울, 그 차가운 광장 바닥의 냉기를 서로의 온기로 이겨내며 “이게 나라냐?” 하는 울분을 토로했다.

필자는 2018년 3월 27일, 대사 부임 인사차 독일 국회(분데스탁) 볼프강 쇼이블레 의장을 예방했었다. 그는 애초 예정된 면담시간을 훨씬 넘기면서까지 한국의 촛불혁명에 대해 물어보며 한국을 '동아시아의 등대'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 인도 시인 타고르가 과거에 한국을 '동방의 등불'이라고 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독일 국회의장의 ‘등대(Leuchtturm)’라는 표현은 처음이어서 내가 다시 한 번 확인하기까지 했다. 한국이 전후 짧은 시간에 급속한 산업화뿐 아니라 역동적인 민주화까지 이루어냈고, 특히 촛불혁명이 평화적으로 진행된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는 것이다. 중국이 민주주의와는 먼 행보를 보이고 있고, 일본은 외형적으로는 민주적 제도를 장착하고 있지만 자민당이 사실상 1당 장기집권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시민적 저항이 살아있는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이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왔던 한국의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후퇴하고 있다. 통일부 장관이 된 인사는 국회 대정부질문 석상에서 “국민 5000만 명이 모두 주권자로서 권력을 행사한다면 대한민국은 무정부상태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여 우리 헌법 제1조(2항)에 명시되어 있는 ‘국민주권(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주권을 무시할 뿐 아니라 주권을 행사하고자 하는 국민을 ‘피의자’ 취급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든다. 안 그래도 현 정권을 두고 ‘검찰정권’이니 뭐니 하는 소리들이 나오는데, 국무위원의 이런 태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국민을 주권자로 대접하지 않고 마치 형사 피의자 대하듯 하는 이런 정치, 아주 위험하다.

정범구 전 주독일대사
정범구 전 주독일대사

다시 가을이다.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며 겸손해져야 하는 계절이다. 추수할 것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지난 계절의 노동과 결실을 돌아보아야 하는 때이다. 낮은 점점 짧아지고 나무는 잎을 떨굴 준비를 한다. 자연의 이치가 이러한데 하물며 인간사회의 유한한 권력이 무에 그리 대수이겠는가? 몇 년짜리 임기의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그 자리의 시간도 곧 지나간다. 겸손을 배워야 할 계절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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