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이 제3, 제4의 공간이 될 때

박미숙 일산도서관 관장
박미숙 일산도서관 관장

[고양신문] ‘이번 달 21일(목)에는 저녁 행사 진행으로 3층 좌석은 6시까지 운영합니다. 이용자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1층 좌석을 10시까지 운영하오니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2층 좌석은 평소와 다름없이 운영됩니다.’

두 달에 한 번쯤은 도서관에 안내문을 붙인다. 3층 입구와 벽, 엘리베이터 안에도 빠뜨리지 않고 꼼꼼히 챙긴다. 그렇지만 행사 날짜가 다가오면 살짝 긴장이 된다. 민원이 없어야 할 텐 데. 그렇게 2년 남짓. 이제는 행사 날 6시가 되면 이용자들이 알아서 자리를 옮긴다. 누구 하나 눈살 찌푸리는 일 없이 자연스러운 분위기이다. 

솔직히, 처음에 3층 자료실을 시민들의 토론장으로 변신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잠이 오지 않았다. 아직은 공공도서관이 ‘공부하는 곳’이라고만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곳을 다르게 사용할 것이라는 얘기를 하는 게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북유럽 도서관들이 자료 공간을 다양한 장소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우리도 한번 해보자 싶었다.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도서관은 시설을 쪼개어 각각의 공간을 나누는 게 아니라 이럴 땐 이렇게 저럴 땐 저렇게 섞기도 하고 가르기도 하는 곳이라는 경험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산도살롱’ 일산도서관에서 따온 ‘산도’와 18~19세기 프랑스에서 남녀노소, 신분·계급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대화하고 토론했던 문화를 일컫는 ‘살롱’에서 따온 말인 ‘산도살롱’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도서관에서 다양한 주제로 시민들끼리 토론을 벌이는 기회를 마련해보자고 만든 자리이니만큼 공간도 다르게 구성하자는 발상이었다. ‘공공도서관에서는 베스트셀러를 많이 사야 하나, 스테디셀러를 많이 사야 하나’ ‘청년 로컬콘텐츠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농인, 청각장애인을 처음 만났습니다’… 주제도 참여자도 다양했다. 

‘산도살롱’을 진행할 때마다 3층 좌석이 아닌 자료를 이용하러 온 시민들은 처음엔 살짝 당황했지만, 곧바로 서가로 가서 자료를 찾았다. 한쪽에서는 시민들이 토론하고, 한쪽에서는 자료를 찾아 읽거나 빌리는 장면이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 있었던 공간이 새로운 ‘장소’가 되는 순간이었다. 

 

『파란 의자』(클로드 부종 지음, 최윤정 옮김, 비룡소)
『파란 의자』(클로드 부종 지음, 최윤정 옮김, 비룡소)

『파란 의자』(클로드 부종 지음, 최윤정 옮김, 비룡소)에 나오는 에스카르빌과 샤부도는 사막을 걷다가 파란 의자를 발견한다. “난 의자가 좋아. 밑에 들어가서 숨을 수 있잖아.” “의자는 거의 요술이야. 개썰매가 되기도 하고, 불자동차, 구급차, 경주용 자동차, 헬리콥터, 비행기, 음, 또 하여튼 뭐든지 될 수가 있거든. 굴러가는 거나 날아다니는 거…. 그리고 물에 둥둥 떠다니는 것도.” 두 친구가 의자를 서커스 도구로 사용하고 있을 때 낙타 한 마리가 소리를 지른다. “의자는 말야! 그 위에 앉으라고 있는 거야!” 그러더니 의자에 앉아버린다. “에이, 우린 가자. 이 낙타는 상상력이라고는 통 없는 거 같다.” 둘은 가버린다. 

도서관 3층은 평소에는 자료실로 쓰이다가 ‘산도살롱’을 하는 날에는 살롱장으로, 북토크가 있는 날에는 토크쇼장으로 모습을 변신했다. 1층 어린이 자료실도 변하기 시작했다. 클래식 공연장이 되기도 하고, 인형 극장이 되기도 했다. 책퍼즐을 하는 놀이터가 되기도 하고, 그림책 원화 전시장이 되기도 했다. 그뿐인가? 도서관 베란다는 텃밭으로 변신했다. 서른 개의 텃밭 상자에서는 패션후르츠와 파파야가 자라고 토마토와 상추, 고추가 자랐다. 

공공도서관 공간이 변화하여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는 다양한 장소가 되었다. 도서관 공간에 새로운 장소성을 부여하는 일은 변화된 사회에서 공공도서관의 가치를 확장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런 공공도서관의 가치는 미국의 도시사회학자 레이 올덴버그(Ray Oldenburg)가 말하는 ‘제3의 장소’와도 맞닿아있다. 가정이나 직장 또는 학교가 아닌 제3의 장소는 동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만나 교류하는 데 필요한 곳을 말한다. 레이 올덴버그는 이러한 제 3의 공간의 특징을 비공식적 공공성에 둔다. 중립적이고 평등하며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주된 활동은 대화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런 일들은 파란 의자를 ‘앉는 곳’으로만 규정한 낙타들은 상상할 수 없다. 
“맞아, 의자는 요술쟁이야. 굉장히 편리하기도 하고, 또 그 위에 올라가면 가장 키 큰 친구만큼 커질 수도 있잖아…. 사나운 짐승이 나타났을 때는 이걸로 막을 수도 있어. 야생동물이 조련사를 물지 못하게 하는 데에도 이만한 방법이 없을 걸. 서커스에 보면 이런 게 나오잖아.”

에스카르빌과 샤부도처럼 ‘파란 의자’가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고 상상할 때, 도서관은 비로소 콘크리트 건물에 책이 가득한 시설이 아닌 새로운 제3, 제4의 장소’로 변신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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