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호의 사람도서관 (9) 김준하 크니브스튜디오(인디게임 개발사) 디렉터

김준하 크니브 스튜디오 (인디게임 개발사) 디렉터 (27살, 풍동)
김준하 크니브 스튜디오 (인디게임 개발사) 디렉터 (27살, 풍동)

[고양신문] ‘나는 과연 내가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상상을 누구나 한번쯤 해보았을 겁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해 불안과 허기를 짊어지고 세상 밖으로 발을 내딛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조금 더 안전하고 안락한 일을 찾고 있을 겁니다. 정답은 없습니다만 여기 재즈피아니스트에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이제는 게임디렉터로 쉴새 없이 자신의 꿈과 낭만을 향해 달려가는 한 고양시 청년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애니메이션 특성화고를 등하교 하다 어린 나이에 출퇴근을 하게 되었죠”
“우리 가족은 진실 된 사이, 허례와 허식 없어. 가족으로 지킬 건 지키면서 동시에 
그 너머의 관계까지 아우르고 있는 관계입니다. 마치 절친처럼”
“직업은 직업일 뿐, 일은 그만두거나 없어질 수도 있지만 삶은 계속 이어져야,
그래서 좋아하는 일과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적정한 간격을 두어야”
“진정 내가 원하는 건, 어느 누구도 대신 만들어주지 않으니
결국 스스로가 스스로를 위해 만들 뿐”

 

■ 어린 시절의 풍경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2~3살 즈음이었어요. 우리 가족은 일산에 오기 전 서울 금호동 달동네에 살았어요. 금호동 언덕배기 부근에 살았는데 어린 저에게는 달동네의 계단들이 너무나 높게 느껴졌습니다. 엄마가 피아노학원으로 일하러 가고 아버지도 일하러 가시고, 그러면 전 할머니 등에 업혀서 저 계단 아래쪽을 보며 엄마가 돌아오는 걸 하염없이 기다렸던 기억이 납니다.

일산으로 5살 때 넘어왔는데 일산동구 마두동에 있는 대우아파트 15층에 살았습니다. 복도식아파트라 복도 끝에 있는 시멘트 난간 구멍으로 일산의 풍경을 바라봤던 기억이 납니다. 집과 차, 도로 등이 작게 보이다보니 당시에는 세상이 참 아기자기하게 예쁘다란 생각만 들었지, 높아서 무섭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엄청 쳤습니다. 어머니가 피아노 학원선생님인데다 마침 집에 피아노가 있었으니깐. 14살 때였나?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우려고 서울 혜화동에 있는 재즈아카데미를 9개월 정도 다녔습니다. 당시 해외음대 원서를 쓰려 했는데 순간 덜컥 겁이 났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떠나면 더 이상 내가 한국사람이 아니게 될까봐 무서웠어요. 곡절 끝에 초등학교 검정고시를 보고 15살에 중1로 백석중에 들어가게 되었죠. 그래도 음악을 계속 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마침 제가 재즈피아노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재즈기타를 전공하는 친구를 알게 되었죠. 거기서부터 제 인생의 주요사건들이 시작됩니다.

그 친구는 플레이스테이션 휴대용 게임기에다가 항상 애니메이션 영상을 넣어 학교에 가지고 왔어요. 그 이후로 친구랑 같이 애니메이션에 빠져 살았죠. 그러면서 중학교 1학년 말 그림도 좀 그려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어 만화학원 취미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학원에 비치된 만화잡지를 통해 여러 만화에 대한 소식을 처음 접했습니다. 어떤 만화의 작화가가 누구인지부터 온갖 인터뷰에, 어떤 애니가 언제 개봉하는지 등의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트리거라는 애니메이션 제작회사에서 <킬라킬>이라는 만화를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때 킬라킬의 컨셉아트와 캐릭터 디자인을 보고 정체모를 무언가가 몸속에서 끓어올랐습니다. 

그때 엄마에게 말했죠. “엄마, 나 이제 애니메이션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엄마, 아빠한테 고마웠던 점이 한 번도 저의 선택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앞으로 그림을 그리며 살아야겠다라고 진로를 바꾼 뒤, 굳게 마음을 먹고 향후 진로와 공부에 대해 많이 알아봤어요. 하남에 있는 한국애니메이션 특성화고에 들어가려고 입시준비를 짧고 굵게 열심히 해서 운 좋게 들어갔습니다. 특성화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나 현장에 바로 투입되어 일할 수 있는 전문가를 양성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학업을 넘어 애니메이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제 주변 친구들은 제가 평생 피아노를 친 만큼 그림을 그렸던 친구들이다 보니, 친구들과 도저히 메꿀 수 없는 실력의 격차를 많이 느꼈습니다. 그때 최소한 그림이라도 여기 있는 친구들보다 괜찮게 그려야 하는데라는 생각에 스트레스도 많았고 동기부여도 많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 갈망과 갈증이 통했던 건지, 운이 좋았던 건지, 고2 때 국내에서 아주 유명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연락이 왔어요. 특성화고는 3학년 때부터 학교를 다니는 대신 회사에 출퇴근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그렇게 레드독컬처하우스라는 애니메이션 회사에 고3 때 입사를 했고 저는 남들보다 일찍부터 등하교가 아닌 출퇴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들보다 빠르게 현장 노하우나 업계 생태계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고 싶었죠. 당시 애니메이션 제작환경이 어렵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 겪은 업무 강도는 무척 괴로운 수준이었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컸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한 반년 정도 집에서 쉬었어요. 

그러다 데브시스터즈(게임 ‘쿠키런’ 개발사)라는 게임회사에 다니던 친구한테 연락이 와서 게임회사에 들어갔어요. 게임회사에서 애니메이션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아봐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그리고 어차피 일도 해야 했으니. 게임회사 내에 애니메이션 수요가 많아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았어요. 그러다 저희 어머니가 암에 걸리셨어요. 마침 회사에서도 내가 원하는 걸 이미 배울 만큼 배운 상황이라 퇴사 후, 밖에서 개인작업을 이어가며 어머님 간호도 병행을 했죠. 어머니가 괜찮아지고 나서 24살 때 다른 게임회사의 애니메이션팀에 다시 들어가 일을 했습니다. 

어느 날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병역관련 문자가 왔고 마침 회사가 병역특례회사라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었어요. 당시 공익훈련소로 들어갔던 사람들은 게임회사 직원이나 프로그래머들 밖에 없었습니다. 훈련을 하다보면 아시다시피 전우들과 필연적으로 친해지는데, 전부 다 게임기획이나 개발 전문가들이다 보니 종이연습장으로 전우들과 함께 우리들만의 게임을 만들어 쉬는 시간마다 놀았습니다. 캐릭터와 스킬을 만들고 게임 밸런싱을 하는 등.

우리는 그 게임을 ‘논산 택틱스’라고 불렀어요. 훈련소 과정이 끝날 때 당시 친구들과 ‘나중에 우리 만나서 이걸 진짜 게임으로 만들자’하면서 헤어졌죠. 보통 그렇게 헤어진 훈련소 친구들은 말만 그렇지 다신 안 보게 되잖아요? 당시 회사에서도 이쁨 받으면서 한창 잘나가고 있을 때였고, 심지어 신규게임이 곧 출시되기 전이라 분위기가 좋았는데 그 와중에 군대에서 만났던 친구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우리 그 논산 택틱스 만들어야지!” 제가 지금 있는 크니뷰스튜디오의 시작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 부모, 선생, 친구들에게서 들은 조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세상일 중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라는 말을 사람들은 많이 하잖아요. 우리 엄마는 ‘세상일은 자기 뜻대로 되는 거야. 그런데 자기가 자기 뜻을 모를 뿐이야’ 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네가 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너의 뜻이고 너의 세상이야 라는 뜻이었는데,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새롭게 만드는 사람으로 저에게는 크게 와 닿는 말이었죠. 그때 이후로 이 말을 제 인생 좌우명으로 쓰고 있습니다.
 

■ 무엇이 당신을 큰소리로 웃게 하나요.

가족과 있을 때 많이 웃었던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해도 우리 가족은 이상하게 많이 친합니다. 얼마 전 아버지가 일 때문에 가파도로 오랜 기간 떠나게 되셨는데, 아버지가 떠나기 전 커피숍에서 네 식구가 한 시간 동안 온갖 이야기로 신나게 떠들었어요. 그때가 저에게는 너무 좋았고 재밌었습니다. 마치 어릴 적 친구 4명이 만났을 때 나오는 그 텐션이 저희 가족에게 있습니다. 뭐랄까? 사회가 바라는 이상적인 가족의 행복이 아니라 절친들이 함께 있을 때의 행복이랄까요? 우리 가족은 진실된 사이입니다. 저희 집은 허례와 허식이 없어요. 아버지로, 어머니로, 자식으로 지켜야할 건 지키면서, 동시에 그 너머의 관계까지 아우르고 있다는 느낌을 가족들을 통해 매번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우울하면 항상 가족을 가장 먼저 떠올립니다. 동생을 떠올리면 그냥 재미있고 엄마를 생각하면 또 재미있고, 아버지를 생각해도 재밌어요. 가족은 저에게 그런 존재들입니다.
 

■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나요.

고등학교 때 애니메이터를 하고 싶어서 졸업하면 어디에 취업해야겠다라는 목록이 저한테 있었습니다. 그 최상단에 레드독컬쳐하우스라는 회사가 있었는데, 그 리스트를 작성하고 나서 3~4일 후에 그 회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네이버카페에 제가 그린 그림을 보고 업체에서 메일을 보낸 거였습니다. 메일을 받자마다 너무 신나, 살면서 그렇게 격앙되게 소리를 지른 적이 없습니다. 어찌나 소리를 질렀는지 뒷머리가 당겨 침대에 누워 30분정도 끙끙댔던 게 기억납니다. 내가 취업을 원하는 회사에서 학생신분인 나에게 먼저 연락이 왔으니 얼마나 신나고 기뻤겠습니까?
 

SBA 서울경제진흥원 지원사업을 통해 상암동 사무실에 작업 중인 사진
SBA 서울경제진흥원 지원사업을 통해 상암동 사무실에 작업 중인 사진

 

■ 간단한 개인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떤 활동들을 하고 있나요.

현재 <스타더스트>라는 게임을 디렉팅하고 있는 크니브 스튜디오의 김준하 디렉터라고 합니다. 아트 및 애니메이션 위주로 작업을 하고 있고 처음에는 집에서 디스코드로 팀원들과 랜선으로 게임을 개발하다가, 현재는 SBA 서울경제진흥원 지원사업을 통해 서울 상암동에 사무실에 잡고 출퇴근을 하며 일을 하고 있습니다.
 

■ 어떤 분들과 함께 일하고 있나요.

훈련소에서 만들어 즐겁게 놀았던 ‘논산 택틱스’라는 게임을 이제 진짜 만들어보자 라는 연락을 훈련소동기한테 받았을 때 여러 고민이 있었습니다. 당시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출시가 얼마 남지 않은 게임이 있었는데, 게임이 출시되고 나서 나의 미래가 막 그려지더라고요. 주식옵션을 받고 뭐가 어떻고 장밋빛 미래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결론은 지금 당장 돈 때문에 무언가를 결정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게임커뮤니티에 앞으로 이런 게임을 만들겠다 라는 소식을 올리자 어마어마한 경력의 개발자, 프로그래머들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유로 모여들었습니다. 2000년대 초 일본회사에 나온 패키지 캐주얼게임이며, 선풍적이고 매니악한 인기를 끌어왔던 <파랜드 택틱스>라는 게임이 제 인생의 첫게임이었습니다. ‘첫’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아무래도 깊은 감상을 남기기 마련이잖아요? 그래서일까요? 저는 게임을 만들거나 작업할 때마다 이 <파랜드 택틱스>가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기다리면 누군가 만들어줄까 싶었는데 결국 아무도 안 만들더라고요. 역시 내가 원하는 건 아무도 대신 만들어주지 않더군요.

저희 사무실에는 저와 똑같이 이 <파랜드 택틱스> 게임의 후속작이나 계승작에 대한 소망과 염원이 있는 팀원들이 알음알음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이다보니 너무 많이 모이게 되었어요. 보통 인디게임은 뜻이 맞는 소수가 만드는 게임인데 저희는 뜻이 맞는 다수가 만드는 게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법인을 만들어 모아둔 돈을 열심히 탕진하며 제가 염원하던 게임을 <스타더스트>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만들고 있습니다.
 

현재 개발 펀딩중인 게임 '스타더스트'의 이미지컷
현재 개발 펀딩중인 게임 '스타더스트'의 이미지컷

 

■ 게임을 개발하며 어려운 점은 없나요.

투자를 받으려면 결과가 있어야 하고, 결과가 있으려면 투자가 있어야하니 웬만한 초기 회사들이 겪는 딜레마를 저희 회사 역시 똑같이 겪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투자가 좀 쉽게 될 줄 알았는데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죠. 이런 와중에 저희 회사와 게임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시작한 지 2년 정도 투자를 받지 않고 저희끼리 작업을 이어갈수록 ‘그래! 이건 기념비 같은 게임이 되겠다. 이건 분명 된다’라는 확신이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 같이 작업하는 팀원들의 이탈도 없고 계속 서로가 고양되는 분위기 속에서 작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될 수 있나요.

저희 어머니께서 “좋아하는 일을 직업 삼으려 하지 말고 자신의 직업을 좋아하려 해라”라는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일부 동의를 했죠. 하지만 직업이라는 건 시장에 수요를 공급하는 일이기에, 직업은 시장성을 기반으로 정해진다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것뿐만 아니라, 남들보다 잘 해야 하고, 남들보다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이렇게 자신이 가진 재능이나 경험, 능력을 상품화 하는 게 저는 직업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드라이한 생각 같지만 대신 저는 직업과 삶을 연결해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직업은 직업이고 삶은 삶이니깐. 일은 그만둘 수 있지만 삶은 계속 이어져야 하는 거잖아요.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될 순 있겠죠. 다만 직업을 너무 깊게 내 삶과 연결해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의 장점을 좋은 가격에 파는 게 직업의 정체인 것 같아요. 내가 좋아하는 건 내 삶의 원동력 같은 것이여서 (나의 원동력을 시장에 판다는 건 자신의 선택이겠지만), 저는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일과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적정한 간격을 두라 말합니다. 서로를 훼손하지 않을 만큼, 상처받지 않을 만큼 그래서 오래오래 두고두고 좋아할 수 있을만큼요. 
 

■ 게임을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어떤 게임을 만들고 싶나요?

게임은 재밌어야 합니다. 음악을 들을 때 즐겁고 재미있는 것과 만화를 볼 때 즐겁고 재미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 즐거움과 재미의 크기가 저는 같다 봅니다. 김연아 선수의 경기와 손흥민 선수의 시합을 볼 때 느끼는 즐거움과, 페이커가 롤경기에서 우승했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희열과 즐거움이 다르지 않다 생각합니다. 경기나 시합, 게임을 만드는 방식과 접근은 전부 다 다르겠지만, 이런 즐거움과 기쁨을 느끼고 사람들에게 전하는 건 전혀 다르지 않다 생각합니다. 바둑기사는 똑똑하고 프로게이머는 멍청할까요? 게임도 오락이지만 바둑 역시 오락이잖아요. 같은 희열과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생각해요.

저는 애니메이터 출신이라 그런지 애니메이션 같은 게임을 만들려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만든 게임을 통해 제 작품세계와 스토리, 아름답고 유기적인 생동감을 유저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요.
 

■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려 노력하고 있나요.

제 동생과 늘 했던 이야기인데, 저는 훗날 학교를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목표입니다. 그것보다 대의적인 목표가 있다면 역사적인 무언가가 되는 겁니다. 위업을 세우고 싶어요. 위업을 남겨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어요. 부끄럽지 않은 과거들을 쌓아 미래세대에게 위대한 과거, 배울 만한 과거로 기억되는 게 목표입니다. 물론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만 아마 제 아버지 나이 즈음이 되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크라우드 펀딩이라고 현재 일반인들, 유저들에게 투자를 받고 있습니다. ‘텀블벅’이라는 크라우드 펀딩사이트를 검색해보시면 디지털 프로젝트 분야에 ‘스타더스트’라는 게임으로 투자를 받고 있습니다. 저의 게임과 펀딩에 많은 관심과 투자를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고양시민으로 인터뷰를 하지만 훗날 한 획을 긋는 멋진 게임개발자로 다시 인터뷰를 할 수 있게 되길 고대합니다.
 

스타더스트 게임개발 후원펀딩 QR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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