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학산 지켜낸 박영일 예비역 장군

수도권 지켜내는 군사방어 요충지이자 
고양과 파주시민에게 큰 사랑받는 명산 
자유로 건설 당시 허물어질 뻔했지만
빠르고 지혜로운 판단으로 온전히 보전 

고양체육관 로비에서 만난 박영일 예비역 장군. 심학산의 운명을 지켜낸 흥미진진한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고양체육관 로비에서 만난 박영일 예비역 장군. 심학산의 운명을 지켜낸 흥미진진한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고양신문] 70~80대 남성 어르신 6명으로 이뤄진 ‘삼수회(三水會)’는 대화동 고양체육관 헬스장에서 만난 지인들의 모임이다. 비슷한 연배의 이웃끼리 매월 셋째 주 수요일에 만나 몸과 마음의 건강을 도모하며 소소한 옛이야기를 나누는 게 삼수회의 일상이다. 이들은 박영일 회원(1944년생, 주엽동 거주)을 ‘박 장군님’으로 부르곤 한다. 17사단장을 거쳐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역임하고 예비역 소장으로 예편한 그가 특유의 온화한 성품과 리더십으로 회원들을 잘 챙기기 때문이다.

얼마 전 박 장군은 회원들에게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회원 한 명이 고양과 파주 경계에 있는 심학산에 다녀온 이야기를 꺼내자, 박 장군이 “이제야 밝히는 얘기지만, 사실 자유로 건설 과정에서 심학산이 사라질 뻔한 걸 내가 살려냈다”고 귀띔한 것. 궁금증이 동한 회원들이 구체적인 내막을 들려주길 청했고, 그들이 함께 들은 놀랍고 흥미진진한 얘기가 고양신문 기자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만년의 벗들인 삼수회 회원들. 왼쪽부터 강덕지, 박영일, 이정희 어르신.
만년의 벗들인 삼수회 회원들. 왼쪽부터 강덕지, 박영일, 이정희 어르신.

자유로 건설 위해 “심학산을 허물자”

고양체육관 1층 쉼터에서 만난 박영일 장군은 팔순 나이가 무색하게 건강하고 활기차 보였다. 인터뷰 자리에 함께한, 삼수회 벗들인 이정희·강덕지 어르신은 “박 장군님이 한사코 고사했지만, 이웃들에게 꼭 알리고 싶어서 취재요청을 했다”고 말했다. 

기자수첩과 펜을 꺼내들고 단도직입으로 ‘심학산 이야기’를 들려달라 청했다. 때는 박 장군이 대령 계급장을 달고 육군본부 작전계획과장으로 복무하던 1989년. 노태우 대통령이 전격 발표한 1기 신도시 프로젝트에 의해 한강변 허허벌판에 일산신도시와 자유로를 건설하는 계획이 세워졌다. 문제는 드넓은 한강변 뻘밭을 메워 30km에 이르는 자유로 1차 구간(행주대교~통일전망대)을 건설하려면 막대한 양의 골재와 토사가 필요했던 것.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성 주체인 한국토지개발공사는 여러 방안 중 하나로 고양과 파주의 경계에 자리한, 높이 194m의 심학산(尋鶴山)을 허물어 공사에 필요한 돌과 토사를 충당한다는 방안을 세웠다. 1930년대 중반 최초의 한강제방인 대보(大洑)뚝을 쌓을 때도 이산포 부근 멱절산 옆 야산 하나를 통째로 파헤쳐 흙과 돌을 충당했던 전례도 있어서, 심학산의 해체는 자유로 공사의 가장 용이한 골재 조달방안이 아닐 수 없었다.

파주 검단산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자유로가 이어진 길 끝 멀리 심학산이 조망된다. 한강하구 너른 들녘 한가운데 우뚝 솟은 명산이다. 
파주 검단산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자유로가 이어진 길 끝 멀리 심학산이 조망된다. 한강하구 너른 들녘 한가운데 우뚝 솟은 명산이다. 

“천혜의 요충지, 허물면 안됩니다!” 

심학산이 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 육군본부 작전계획과장 박영일 대령이 토개공의 계획에 대한 첩보를 포착했다. 군 생활 대부분을 작전분야에서 보낸 박영일 작전계획과장은 토개공의 계획이 너무도 위험하고 경솔하다는 걸 직감했다. 군사분계선과 불과 10km 떨어진 한강변에 자리한 심학산은 군사작전상 너무도 중요한 수도권 방어의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배후에 대규모 신도시가 건설되는 상황에서는 심학산을 손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 대령은 주저 없이 본인의 견해를 조목조목 담은 보고서를 작성해 육군참모총장에게 직접 보고했다. 박 대령의 보고서와 설득력 있는 설명은 육군참모총장의 마음을 움직였고, 마침내 심학산을 손대지 않는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하마터면 자유로 밑바닥의 골재로 사라질뻔한 심학산을 한 장의 보고서가 지켜낸 것이다. 

심학산 전망대에서 북쪽을 바라본 풍경.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바다로 향하는 조강으로 이어진다. 가운데 희미하게 보이는 곳이 북녘땅이다. 
심학산 전망대에서 북쪽을 바라본 풍경.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바다로 향하는 조강으로 이어진다. 가운데 희미하게 보이는 곳이 북녘땅이다. 

북녘땅까지 보이는 최고의 조망 명소

박 장군은 당시의 결정을 “어디까지나 군인 신분으로서 내린 결단”이라고 회고했지만, 이면에는 고향마을의 추억을 지켜야한다는 정서적 절박함도 작용했으리라는 게 주변 지인들의 짐작이다. 
“고양군 대화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부터 심학산으로 소풍을 가곤 했습니다. 너른 들녘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심학산은 말 그대로 마을사람들의 고향이었죠.”

박 장군의 회고처럼 그가 지켜낸 건 단순히 군사적 요충지만이 아니었다. 오늘날 심학산에는 등산로와 둘레길이 조성돼 파주와 고양의 시민들이 즐겨 찾는 녹지공원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능선길 끝 정상 전망대에 올라서면 동서남북으로 북한산과 한강하구, 고양과 파주와 김포는 물론 멀리 북녘땅 산줄기까지 한눈에 바라보인다. 가히 한강 하구 최고의 조망 포인트라 할 수 있다. 산자락 아래 조성된 파주출판도시 역시 든든한 심학산이 뒤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터를 잡기 어려웠을 게 분명하다. 

심학산을 자주 찾는다는 이정희·강덕지 어르신은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심학산이야말로 고양과 파주 사람들에겐 최고의 명산”이라며 “이 산이 없었다면 얼마나 허전했을까 생각하면, 박 장군님께 큰 절을 해도 모자랄 것”이라며 함께 웃었다.

심학산 전망대 동쪽 전망. 교하와 금촌, 운정지구 등 파주시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심학산 전망대 동쪽 전망. 교하와 금촌, 운정지구 등 파주시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중립수역 처음 통과한 사미섬 준설선

그렇다면, 심학산 계획이 반려된 후 자유로 골재는 어디서 수급했을까?
“심학산의 대안으로 찾은 게 바로 한강 한가운데 모래가 퇴적돼 쌓인 사미섬이었어요. 문제는 사미섬에서 골재를 채취하려면 거대한 준설선이 필요한데, 한강하구로 큰 배가 들어오려면 남과 북이 마주하고 있는 비무장지대(한강하구 중립수역) 물길을 통과해야 한다는 점이예요.”

잠깐 상황을 짚어보자면,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예성강 하구와 이어지는 조강(祖江)지역은 정전협정상 남북한의 민간 선박이 자유롭게 항행할 수 있는 중립수역으로 규정돼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휴전 이후 남과 북 어느 쪽도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하는 물길이 되었다. 그 금단의 문을 가장 먼저 열어젖힌 게 바로 1990년 11월 사미섬 골재채취를 위해 호출된 8척의 준설선단이었다. 박영일 장군은 “준설선단의 중립수역 통과를 추진하기 위해 국방부와 한미연합사 등의 긴박한 공조가 있었다”고 회고한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오롯한 현대사다. 

파주출판도시와 건너편 김포시 풍경. 1990년, 분단 이후 최초로 중립수역을 통과한 사미섬 준설선이 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파주출판도시와 건너편 김포시 풍경. 1990년, 분단 이후 최초로 중립수역을 통과한 사미섬 준설선이 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아들아, 현역으로 군대 다녀오자”

심학산 이야기에 이어 박 장군의 인생사도 청해 들었다. 
“내가 자랄 때만 해도 고양군은 완전 시골이었고, 전방지역의 긴장감이 역력한 동네였죠. 군인이 되고 싶어 열심히 공부해서 육사에 진학하려고 하는데, 친척들을 다 찾아봐도 신분보증을 서 줄 사람이 없는거예요. 하는 수 없이 교장선생님께 도움을 청해 겨우 육사에 합격했습니다. 배경이 미약하니까 오로지 스스로의 노력으로 앞날을 헤쳐나가야 한다고, 초장부터 굳게 맘을 먹었죠.”    

박 장군은 군인을 천직이라 여기고 어디로 발령을 받든 충심을 다했다고 한다.
“군인의 삶이 다 그렇지만, 저 역시 군생활을 통틀어 무려 45번 이사를 하며 전·후방을 오갔어요. 아이들도 초등학교를 7번씩 옮겨야 했구요. 돌이켜보면 그 생활을 함께 견뎌 준 두 자녀, 그리고 평생의 동반자인 아내 김영순 여사에게 참 고마울 뿐이지요.”

자녀 이야기가 나오자, 옆에서 듣던 이정희 회원이 “자녀분 군대 집어넣은 얘기도 한번 하시라”고 부추긴다. 90년대 중반, 박 장군의 아들이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방위복무 판정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입영자원이 넘치던 시절이라 특별한 이유 없이도 방위 판정을 받곤 하던 시절이었지만, 박 장군은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곧바로 병무청에 전화를 해서 신검을 다시 요청해 현역으로 보냈습니다.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아라면 국가를 위해 의무를 다하는 게 당연한 일이니까요. 아들녀석이 속으로 원망 좀 했을지도 모르지만요(웃음). ”

심학산 정상 전망대.
심학산 정상 전망대.

고향인 고양에서 보내는 평안한 만년 

2000년 예편 후 박영일 장군은 한국민속촌 사장을 10여 년 역임하고 고향인 고양시로 돌아와 만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운동과 독서, 부모님이 물려준 고향집 부근 자그마한 텃밭에서 농작물을 키우는 게 박 장군의 소소한 일상이다.

몇 해 전까지는 1군단과 협조해 9사단과 30사단 등 고양시에 소재한 부대에서 신병들에게 정신교육 특강을 4~5년 진행하기도 했다. 까마득한 퇴역장군이 들려주는 생생한 이야기가 신병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는 게 박영일 장군의 자평이다. “다시 태어나도 주저 없이 군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 여전히 단단한 자부심이 넘쳐난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 기자에게 이정희·강덕지 어르신이 한마디를 보탠다. 
“바람이 있다면, 박 장군님이 심학산을 지켜낸 이야기를 적은 소박한 기념비를 등산로 한쪽에 세우고 싶어요. 시민들에게 이 얘기가 알려지면, 많은 분들이 기념비 조성에 공감하시리라 기대합니다.”

파주출판도시의 듬직한 뒷산인 심학산.
파주출판도시의 듬직한 뒷산인 심학산.
심학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겨울의 석양.
심학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겨울의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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