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고양신문]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이 역대 최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는 이야기는 별로 충격효과가 없다. 지난 20여년 간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덕분에(?) 각종 사회보장제도가 확대되었다. “저출산 예산 몇백조를 쓰고도 소용없다.”는 선동적인 발언이 여전히 신문 지면을 장식하지만, 한국은 아이 낳고 키우는 지원에 OECD 회원국 평균 이하로 지출하는 국가다. 그리고 저출산 예산이 진짜 저출산 예산이냐는 문제 제기도 가능하다. 어쨌든 저출산 대응을 이유로 일자리나 주거 지원, 아동 돌봄과 교육 체계 확대, 아동수당 등 각종 사회보장제도가 뒤섞이면서 확대된 것도 결국 성과는 성과다.  

그런데, 사회보장제도 중심 비용 부담을 덜어주는 지원이 자리를 잡으면 아기울음 소리가 커질 수 있을까? 아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서유럽 복지국가 발전의 기본 토대는 ‘성별역할분리규범’이었다. 가족부양자로서 남성이 나가서 일하고 전업주부로서 여성이 살림을 도맡는 가족을 전제로 삼았다.

그래서 사회복지란 가장으로서 남성이 노령, 질병, 실업, 사고, 장애 등의 사회적 위험에 처했을 때 여기에 대응하는 연금이나 의료 등 사회보장제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돈 버는 아빠가 늙어서 더 이상 일하지 못하게 됐을 때, 아빠가 다치거나 실업자가 돼서 돈을 벌지 못할 때, 피부양자인 가족이 먹고살 수 있는 지원을 해주는 것이 전통적 복지국가 모델이었다. 간단히 말해 전통적 복지국가에서 어린이집, 유치원 같은 사회적 돌봄 체계와 요양원 같은 노인보호시설이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런 일은 엄마, 며느리, 딸 등 여성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여성 사회진출이 확대되면서 가족 내 돌봄 공백이 생겨났다. 집에서 살림만 하던 여성이 취업 활동을 시작하면서 아이와 노인을 돌볼 사람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여성의 취업을 억제하는 대응은 불가능했다. 맞벌이를 해야 함께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이 되었고, 무엇보다 여성의 변했기 때문이다. ‘경력과 가족’ 사이에서 여성은 기꺼이 경력을 택했다. 아이 낳고 키우는 비용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서유럽 복지국가에서 저출산 현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이유다. 여성들끼리 함께 스크럼을 짠 것도 아니다. 그러나 경력을 선택한 개인적 결정이 모여서 사회적 흐름으로서 ‘출산파업’같은 양상으로 나타났다. 여성 고용률이 높아질수록 출산율이 내려갔다. 

남성 가장의 경험으로서 사회적 위험인 노령, 질병, 실업, 장애, 사고에만 대응하던 전통적 복지국가 체제는 여성 출산파업에 대한 대응으로서 사회적 위험 개념을 확장하였다. ‘출산과 양육’을 신사회적 위험으로 규정하고 국가적 개입을 시작하였다. 영유아 대상 사회적 돌봄체계를 구축하고 초등학교에서 오후 교육ㆍ돌봄이라는 융합서비스를 도입ㆍ확대하였다. 엄마의 일ㆍ가정양립을 위한 제도적 변화는 아빠의 돌봄 참여와 병행되었. 엄마의 돌봄을 전제로 했던 가족정책의 패러다임이 부모의 돌봄으로 전환되었다. 

가능해진 아빠와 엄마의 일·가정 양립은 출산율 상승으로 이어졌다. 여성 고용률 상승에 따라 내려가던 출산율이 다시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 고용률이 올라갈수록 내려가던 출산율이, 가족정책 패러다임 전환에 따라, 다시 올라가는 ‘U자형’ 곡선 모양이 되었다. 이를 출산율과 고용률 변화의 ‘이행의 계곡’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성 고용률이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그러나 출산율은 바닥으로만 내려간다. 아직 한국 여성에게는 여전히 가족과 경력 중 하나를 정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출산장려금 쏟아부면 여성들이 아이를 낳을 것이라 믿고 계시나? 부모의 일ㆍ가정양립이 가능해질 때 우리나라 여성들은 출산파업을 멈출 것이다. 언제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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