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시대 금표비. 비록 인적이 드문 길가에 초라하게 서 있지만 준엄한 역사의 법칙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연산군시대 금표비. 비록 인적이 드문 길가에 초라하게 서 있지만 준엄한 역사의 법칙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고양신문] 통일로 가장동삼거리(고양시 관산동)에서 중부대학교 고양캠퍼스 쪽으로 향하다가 대자16통 못미쳐서 좌회전을 하면, 이내 다소 초라한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연산군시대 금표비>이다. 연산군이 흥청들과 함께 사냥과 유희를 즐기기 위해 고양지역의 백성들을 내쫒고 금역임을 표시한 폭정의 상징물이다. 이 금표비는 나중에 도성 밖 백리에까지 세워졌으나 중종반정 이후 대부분 파괴되었다. 결국 땅속에 묻혀있던 고양시의 것만이 유일하게 보존되었던 것인데, 그것이 1984년에 발견됐다. 

 가족들과 함께 영화 <서울의 봄>을 보았다. 개봉한 지 한 달 갓 지나 누적관객 수가 1000만 명을 넘어섰다. 흥행기록이 어디까지 갈지 자못 궁금하다. 이 시기에 <서울의 봄>이 국민적인 관심을 끌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작금의 정치적인 상황과 관련된 통치자의 자질문제를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본다. 필자는 영화 배경이 된 그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 소식을 듣고 나라가 망하는 줄 알았다. 그는 필자가 태어나던 해에 대통령이 되어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18년간 줄곧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켰던 인물이다. 그러니 ‘박정희’라는 고유명사는 곧 ‘대통령’이라는 보통명사였다. 그는 신이고 영웅이었다. 그런데 그 영웅의 실체를 알게 된 것은 대학생이 되어서였고, 공교롭게 내가 대학생이 되던 해에 그 영웅의 후계자이자 영화속 주인공이 대통령이란 절대권력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나는 태어나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군사반란의 주역들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교육을 받았다.

 조선시대 세자의 교육훈련 시스템은 아주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보통 왕세자가 다섯 살이 되면 담당 관청인 시강원 내에 강학청(講學廳)이 설치되고 영의정을 수장으로 하는 당대 최고의 석학 20명이 스승으로 임명된다. 세자는 그들을 통해 하루 7시간 이상 경학은 물론 효행, 신체단련 등 준비된 왕으로 태어나기 위한 힘겨운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20대 후반에 왕이 된다고 가정하면 20여 년 동안 바른 통치자가 되기 위한 준비 기간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이 교육훈련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성군이 된 왕은 세종, 정조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왕의 후사가 없을 경우나 갑작스러운 죽음, 반정, 정변 등이 발생하면 이 시스템은 가동할 수가 없게 된다. 설령 제대로 가동된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을 이겨내지 못한 양녕대군이나 사도세자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인종의 왕세자 시절 스승이었던 퇴계 이황은 명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전혀 준비되지 않은 선조가 17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바쳤다. 그는 이 책에서 ‘국가의 만기(萬機)는 군주의 한 마음에서 비롯되므로 태만하고 소홀히 하여 오만과 방종으로 이어진다면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들끓는 것처럼 혼란해진다’며 군주의 자질과 도리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퇴계의 충절과 바람, 그리고 이어진 율곡 이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끝내 ‘준비되지 않는 군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고 백성들을 임진왜란이라는 도탄에 빠지게 한다. 

 군주 또는 통치자. 이들은 시대나 장소를 떠나 한 국가 내에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결정이나 말 한마디로 국민의 행·불행이 바뀔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준비된 왕’을 원했고 철저한 교육훈련 시스템을 가동했던 것이다. 시대가 바뀌어 민주주의와 지방자치가 정착한 21세기를 살고 있다. 비록 절대군주나 군사독재는 사라졌지만 아직도 우리는 주위에서 무지와 아집에 빠져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정치지도자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유권자들이 그들에게 권한을 맡긴 이유는 언로를 열고 소통을 통해 보편타당한 민주주의를 실천해 달라는 것이다. “선거를 통해 당선되었으니 임기 내에는 누구도 간섭하지 마”라는 아집에 빠져있다면 그들도 연산군이나 군사독재자들의 최후의 모습에서 크게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이다. 이제 되풀이 되는 비극과 혼란을 더 이상 이어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유권자들은 눈과 귀를 더 크게 열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제대로 돌릴 시간이다. 

윤병열 고양문화원 고양학연구소 전문위원
윤병열 고양문화원 고양학연구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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