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없는 삶>(Leave No Trace)

[고양신문] 새해가 되며 이런저런 소원들을 꿈꿔보곤 한다. 뭔가로부터의 ‘탈출, 또는 독립’을 꿈꾸는 이들도 적잖을 터. 이런 주제를 다룬 끝판왕 영화 하나를 넷플릭스에서 만났다. 제목부터 범상찮은 <흔적 없는 삶>(감독 데브라 그레닉, 2017년 작)이다. 

아버지 윌과 10대 딸 톰은 깊은 숲속에서 살아간다. 한가롭게 캠핑을 온 건 아니다. 부녀는 물과 식량, 잠자리까지 모든 것을 자연에서 얻으며 생존을 이어간다. 이들의 바람은 외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는 것. 그러려면 영화 제목처럼 ‘흔적 없는 삶’을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삶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결국 사소한 실수로 삼림감시원들에게 발각되고, 복지담당자에게 인계된다. 이후의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간다. 아버지 윌은 또다시 딸과 함께 숲속으로 사라지려고 하지만, 딸 톰의 마음은 혼란하기만 하다. 

문명의 삶과 자연의 경계인 삼림공원길. 윌은 길을 벗어나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문명의 삶과 자연의 경계인 삼림공원길. 윌은 길을 벗어나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영화를 보며 가장 먼저 드는 질문. 윌은 왜 도망치려는 걸까? 하지만 영화는 관객들이 이 질문에 오래 머물도록 두지 않는다. 절제된 단서들을 통해 윌이 전쟁에 참전했고, 거기서 엄청난 트라우마를 얻었다는 걸 암시할 뿐이다. 대신 영화는 ‘사회로부터 독립된 삶이란 어디까지 가능한가?’라는 또다른 질문에 주목해주기를 요청한다.  

영화는 ‘독립적인 삶’에도 여러 단계와 유형이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 질서를 대변하는 복지국 직원과 의료인들은 윌과 톰을 ‘정상적 삶’으로 돌려놓기 위해 나름 노력하지만, 역부족이다. 숲과 마을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텐트촌 노숙자들도 등장한다. 자발적 독립이라기보다는, 사회로부터 도태에 가까운 이들이다. 

다음으로 부녀의 사회적응을 돕기 위해 숙소와 일자리를 제공해 준 농장주인. 물리적으로는 자연 가까이에서 독립적 삶을 영위하는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사회가 저지르는 대규모 자연 착취의 대행자이기도 하다. 크리스마스 트리로 팔기 위해 전나무 묘목들을 줄줄이 잘라내는 전기톱 소리를 윌은 견뎌낼 재간이 없다.

네 번째 그룹은 숲속 캠핑장마을 사람들이다. 농장을 탈출해 또다시 숲으로 잠적하다가 심각한 부상을 당한 윌을 살리기 위해 톰이 다급하게 달려가 도움을 요청하자, 이들은 이유를 묻지도, 섣부른 조언을 건네지도 않고 대가 없이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된 윌은 또다시 톰에게 짐을 챙겨 떠나자고 말한다. 늘 그랬듯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말고.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타인과의 소통에서 따뜻함을 발견한 톰의 마음이 흔들린다.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면서도 각자의 삶을 위해 헤어짐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윌과 톰 부녀.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면서도 각자의 삶을 위해 헤어짐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윌과 톰 부녀.  

영화는 이 대목에서 ‘관계로부터의 독립’이라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톰은 윌이 반복하곤 하는 “이 삶은 우리 것이 아니야”라는 말에 간결한 대답을 돌려준다. “우리가 아니라 아버지죠.” 이어 이렇게 말한다. “남을 수 있었다면, 남으셨으리란 걸 알아요.” 

이 짧은 말 속에는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이제 저는 제 삶을 살기 위해 남을게요, 잘가요 아빠… 등등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가끔씩 어떤 종류의 영화 대사들은 시어의 함축성을 뛰어넘곤 한다.   

숲속 갈림길에서 기약 없는 헤어짐의 장면을 보여준 벤 포스터(윌)와 토마신 매킨지(톰)의 연기는 깊고 오랜 여운을 남긴다. ‘영화 속 이별장면 베스트10’에 무조건 한 표다. 물론 그런 투표가 있다면 말이다.

'허공에의 질주' (시드니 루멧. 1988)
'허공에의 질주' (시드니 루멧. 1988)

영화를 보며 오래전 영화 하나가 떠올랐다. 29세 나이로 요절한 꽃미남 배우 리버 피닉스의 대표작 <허공에의 질주>(1988년작, 시드니 루멧 감독)다. 영화 속 리버의 부모 역시 늘 쫓기며 살아가는 이들이다. 차이가 있다면 <허공에의 질주>의 부모가 처한 쫓김은 정치적 신념(반전운동)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지만, <흔적 없는 삶>의 윌은 어찌할 방법이 없는 고통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점이다. 

후자에게는 강요도, 설득도, 제도적 혜택도 무용지물이다. 마음 깊은 이해의 행위만이 이런 존재들의 생존을 조용히 도울 수 있을 뿐이다. 캠핑장 아주머니가 나무에 걸어놓는 숲속 사람들을 위한 비상식량 배낭, 또는 톰이 목걸이 부싯돌과 함께 아빠에게 건넨 사랑의 눈빛 같은 것들 말이다.

부모와 다른 삶을 선택하는 아들(리버 피닉스)에게 아버지는 "가서 세상을 바꿔라, 우린 최선을 다했다"라는 말을 건넨다.
부모와 다른 삶을 선택하는 아들(리버 피닉스)에게 아버지는 "가서 세상을 바꿔라, 우린 최선을 다했다"라는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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