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본 세상

박미숙 상상공간 별-짓- 대표
박미숙 상상공간 별-짓- 대표

[고양신문] ‘이걸 입을까? 저걸 입을까?’ 여러 벌을 꺼내 거울 앞에 서서 대본다. 어디 귀한 모임이라도 가는가 보다 하겠지만, 오늘은 실업급여를 신청하러 가는 날이다. 지난 12월 31일자로 일산도서관 위탁이 종료되면서 실업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진하게 그리던 아이라인도 가늘게 그리고 입술에 바를 립스틱은 생략. 최대한 초라해 보여야 한다. 괜히 화려하게 꾸미고 갔다가 실업자 분위기가 나지 않을까봐 경계하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자괴감이 들었다. 실업자가 무슨 사회악도 아니고, 실업급여는 내가 냈던 ‘고용보험’을 토대로 나오는 거 아닌가. 

실업급여는 ‘세금’ 개념이 아니라 ‘보험’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알맞다. 1995년 도입된 고용보험은 "실업 예방, 고용 촉진, 근로자 직업능력 개발 및 향상, 국가의 직업지도, 직업 소개 기능 강화, 근로자 실업시 생활에 필요한 급여(구직급여, 취업촉진수당)를 실시해 근로자의 생활안정과 구직활동을 촉진"(고용보험법 제1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일부 국가보조금이 지원하긴 하지만, 국민의료보험처럼 언제 나에게 닥칠지 모를 실업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인 것이다. 

물론 실업급여를 타서 명품백을 사거나 해외여행을 다니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실업급여를 핑계로 구직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실업급여는 보편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 다시 말하면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게 아니라, 다시 취업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기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합의한 결과인 것이다.

그림책 『이렇게 같이 살지』(김윤경 지음. 향)에는 여러 식물과 함께 사는 동물들 이름이 나온다. 실제로 같이 사는 건 아니고, 그 식물과 비슷한 동물을 함께 등장시켜 서로 닮아있는 생명들 이야기를 한다. 바다거북과 금낭화는 바다와 산을 나누며 살고, 코알라와 갯버들은 꼬옥 껴안고 꿈속을 거닐며 산다. 애벌레와 강아지풀은 지치지도 않고 기다리면서 함께 살고, 두더지와 고구마는 어둠 속에서 길잡이가 되어 함께 살고, 고슴도치와 밤송이는 깊은 밤을 지키며 씩씩하게 함께 산다. 그렇게 닮은 모습들이 숲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고 세상을 이루며 산다. 

다른 듯 닮고, 닮은 듯 다른 생명들이 모여 사는 세상. 우리는 이렇게 다른 것들이 모여 사는 세상을 좀 더 잘 만들기 위해 법과 제도를 만든다. 그렇다면 ‘세상을 좀 더 잘 만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서로 혐오하지 않는 세상, 배려하고 돕는 세상, 연대하는 세상이라고 하면 너무 추상적일까? 그런데 연대적 재분배를 바탕에 둔 여러 사회 문제까지 시장논리로 얘기하면 어떻게 될까? ‘일하지 않는 사람이 내가 낸 세금을 축낸다’는 논리가 나오게 되고 ‘실업’이 아니라 ‘실업자’를 문제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다. 경제 원칙이 우선시 되면 ‘임금 노동’이 ‘능력’이 되는 세상이 된다. 돌봄 노동을 하는 여성이 능력 없는 사람이 되고, 장애인이나 고령자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오스트리아의 사회학자 라우라 비스뵈크는 『내 안의 차별주의자』(라우라 비스뵈크 지음, 장혜경 옮김. 심플라이프)에서 ‘엘리트들이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을 연출하며 자신들이 피해자인 양 행동한다며 열심히 노력해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자신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남들이 편안하게 먹고산다는 이미지를 퍼뜨린다고 지적하며, 차별과 구분은 민주주의 사회의 안정과 결속을 해친다.’고 말했다.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실업자’가 아닌 ‘실업문제’이고, 노인이 아닌 ‘고령화’이며 ‘돌봄노동자’가 아닌 ‘돌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서로 닮은 듯 다른 생명들이 서로 기대어 어떤 때는 어둠 속에서 길잡이가 되고, 깊은 밤을 지키기도 하고, 함께 지치지도 않고 기다리며 살 수 있을 테니. 

옷장을 다시 열었다. 평소에 즐겨 입던 체크 블라우스와 회색 바지로 갈아입었다. 예쁘게 꾸밀 것까진 없지만 립스틱도 발랐다. ‘이렇게 같이 살기’ 위해 이번엔 내가 사회적 장치를 사용하러 간다는 생각을 하기로 했다. 언젠가 다른 사람이 사용하기 위한 연대도 잊지 말고, 실업급여조차 신청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살 것인가도 고민해보자 했다. 

날은 추웠지만, 가슴이 뜨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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