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호의 사람도서관 (11) 김진이 행신동 주민(1970년생) 

행신동 주민 김진이씨.
행신동 주민 김진이씨.

[고양신문] 새해입니다. 해마다 이쯤이 되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전에는 하지 않았던 새롭고 그럴싸한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누군가 시키지 않아도 나를 위해 미뤄두었던 크고 작은 소망과 목표를 올해는 꼭 이루리라 마음먹지만, 결국 연말이 되어서는 작년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자신을 돌아보며, 연이은 자책과 또다시 새로운 결심을 하는 일 따위가 반복됩니다. 여기 20년 넘게 지역에서 신문기자로, 그리고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조사과장으로 근무하다가 행신동 동네 주민으로 돌아온 김진이씨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50살이 훌쩍 넘은 어른 김진이는 그동안 무엇을 깨닫고 올해에는 어떤 다짐을 새롭게 했을까요? 


■ 어린 시절의 풍경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서울 구파발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구파발은 지금처럼 서울이 아니라 아마 고양군이었을 겁니다. 그 시절 구파발은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산자락이 많은 촌이었습니다. 5살즈음이었을까요? 혼자서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던 기억이 많이 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주욱 혼자였어요. 보통 남들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또래 아이들하고 많이 놀았다하는데 제 주변에는 아이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가기 전에 아빠가 사업이 어려워져서 불광동으로 이사를 왔고 집안사정으로 불광동 주변을 계속 옮겨 다녔습니다. 내성적인 성격 때문인지,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인지 사람들 앞에서 늘 말수가 없었고 그 덕에 얌전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우리 집도 참 못사는 집이었는데 당시 제가 다니던 불광초등학교에는 가난한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1학년 한 반이 60~70명 정도 되었고 심지어 2부제, 3부제로 등교를 했습니다. 누군가는 아침에, 누군가는 오후에 등교를 했죠. 아이들이 너무 많으니 당시 선생님은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지도 못했고, 아이들이 무얼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교실이 난장판인데 자기들 할 말만 하고 수업을 끝내기 일쑤였죠. 
그러다 3학년 때 선생님 한 분이 저를 많이 신경써주셨습니다. 저는 제가 눈이 나빴는지 몰랐는데 선생님이 저를 안과에 데리고 가라 엄마한테 말해서 그 때부터 안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막연하게 눈이 나쁜 줄만 알았는데, 안경을 맞추고 나서는 3학년 때부터 학교수업도 잘 따라가고 글짓기 대회에도 나가면서 비로소 남들처럼 평범하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어른 한 명의 소소한 관심 하나가 한 아이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절감했습니다.

■ 학창시절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나요.

아버지가 중1때 돌아가셨습니다. 원래도 가난했는데 더 어려워졌죠. 고등학교 때는 이래저래 돈이 많이 드는데 그런 것을 낼 돈이 저희 집에는 없었어요. 동명여고 1학년 때 먼저 다가왔던 친구 덕분에 둘이 맨날 점심시간에 손잡고 교정에서 책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 친구가 칼릴 지브란(레바논 출신의 시인·화가)의 시집을 선물해줬던 기억이 납니다. 그랬던 친구가 2학년 때 가출을 해서 그 집에 가봤는데, 알고 보니 이 친구가 아버지로부터 가정폭력에 오래 시달렸다는 이야기를 처음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친했는데 서로에 대해 너무 몰랐다니. 그러고 보니 둘 다 서로의 깊고 어두운 이야기는 외면한 채, 책으로 현실도피를 했던 것 같습니다. 
몇 년 후 어른이 되어 이 친구를 다시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친구는 가출 후 독립해서 방직공장에서 일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혼자서 힘들게 삶을 꾸렸다 했습니다. 당시 나는 대학에 다니고 있고 이 친구는 하루하루 먹고 살아야 하다보니, 반가워서 만났지만 막상 서로 할 이야기가 더 이상은 없었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학생 때는 공부를 좀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 말고는, 당시에는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 늘 먼 거리를 걸어 다니고 골목을 돌고 책 한 권을 여러 번 읽거나, 방에 누워 벽지의 문양을 세어보거나 이런 저런 상상을 했습니다. 놀 것도 없고 도구도 없고 그렇게 심심했던 시간들에 저는 혼자 남아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밖에서 보면 짠하고 안타까워 보일 수도 있는데, 아이를 키울 때 좀 심심하게 놔두어야 한다는 말을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되고나서 이해했습니다. 
당시 저는 그리울 것도, 할 일도 없는 학생이었습니다. 연신내 헌책방에서 하루 종일 책을 보고 생각을 주로 했는데 헌책방 주인은 그런 저를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돌아보니 어른들의 무관심하고 간섭 없는 시간들과 심심하고 외로웠던 시간이 지금의 저를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내가 바쁘거나 주변에 재미난 것들이 많았다면 아마 책에 빠지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책 속의 비참하고 처참한 세상이 가난하고 내몰려있는 어린 학생에게 오히려 위로가 될 때가 많았습니다. 


■ 무엇이 당신을 큰소리로 웃게 하나요?

저는 생각보다 잘 웃습니다. 상대가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할 때 많이 웃었던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아는 지인과 수다 떨면서 술을 한잔 했는데, 교회집사였던 분이 최근 불교로 개종했다는 이야기가 너무 재밌었습니다. 큰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는 분이 절에 좀 같이 가자해서 갔더니 그냥 절이 좋아서 바꿨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분의 새로운 종교적 도전을 응원하면서 서로 함께 많이 웃었습니다. 지역기자 일을 할 때에는 동네주민들과 개인적인 관계이면서 동시에 취재원이기에 정치이야기나 공적인 이야기들을 주로 나눴는데, 이제는 개인적인 소소한 이야기들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진솔한 자기 이야기와 격려를 하는 자리가 점점 더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세월호 1기 특조위 근무가 끝나고 건강이나 상태가 유독 안 좋았습니다. 그때 아는 지인이 신촌에 있는 비폭력대화 수업을 듣고 좋아졌다는 말을 듣고 참가했는데, 비폭력대화 수업 시간에 구성원들이 자기 고충의 이야기를 하는 시간 중 ‘집사님과 싸웠다’, ‘집 강아지가 말을 안 들어 속상하다’ 이런 류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듣다보니 너무 하찮고 짜증이 솟구쳐서 그 수업을 끝까지 못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분명 덤덤히 들어줄 수도 있는 이야기였는데.
마음이 점점 사납고 황폐해졌습니다. 사람들이 꽃을 보고 이쁘다 하면 ‘꽃이 펴서 어쩌라고! 내가 이렇게 힘든데’라거나 첫눈에 사람들이 환호와 경탄을 하면 ‘눈이 오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라는 마음이 들 때였습니다. 이런 일은 재난이나 참사의 피해자와 조력자들에게서 일반적으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라 합니다. 그때 다 못 들었던 수업을 최근에 이어서 이제 다시 듣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진심으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공감하고 격려하며, 사람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게 정말 쉽지 않다는 걸 배우게 되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배워야겠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는가?

저는 일을 좋아합니다. 일하면서 최고의 순간을 많이 느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지역을 1도 모르는 상태에서 지역신문에서 기자일을 배웠습니다. 허허벌판에 있는 외진 파출소의 식당아줌마가 퇴직금을 못 받았던 내용을 제보 받고 곡절 끝에 인터뷰를 마치고 첫 기사를 썼습니다. 그런데 이게 모든 파출소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었고 결국 전국적으로 공론화가 되어 법제화까지 마련된 사례가 되었습니다. 그때 내가 정말 의미있는 일을 하는구나 라는 뿌듯함을 느꼈고, 이후로도 나의 삶과 나의 일 속에서 이런 구간들이 꽤 많았습니다. 이 의미있는 일들 사이에 내가 있구나 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낄 때가 저에게는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 간단한 개인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저는 지역신문 일을 20년 넘게 했고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사회적참사조사위원회에서 공무원, 조사관으로 5년간 일을 하였으며 지금은 ‘앞으로 동네에서 뭐하지?’라는 고민을 하고 있는 행신동 아줌마이자 민간인입니다. 
 

■ 지역신문기자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나 동기는 무언가요? 

대학 졸업하고 공부방에서 2년 정도 일하고 나서 ‘이젠 뭐하지?’ 라고 생각하던 찰나, 친한 선배에게서 지역신문기자로 일해보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재미있겠네 라며 큰 고민 없이 수락하였습니다. 지역신문기자는 무엇인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오래 하며 일했습니다. 지역신문기자는 ‘기자’라는 단어보다는 ‘지역’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두어야 하는 일 같습니다. 10년차가 넘어가면서 스스로가 기자보다는 활동가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이슈와 사안이 발생하면 공론회나 토론회를 만들고 대안을 만들어내는 일에 더 집중했습니다. 개발 이슈 관련 기사는 욕과 폭력이 난무하는 장면이 많다보니 신문사 내부에서도 이걸 왜 우리가 하느냐 라는 불만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적극적으로 현안이나 민원, 갈등에 개입하고, 입장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기사를 쓸 줄 몰라서 A는 이랬고 B는 이랬고 C는 이렇다 라는 사건과 상황을 기술하는 기사를 주로 썼는데, 후에는 입장을 가지고 기사뿐만 아니라 칼럼을 자청해서 쓰고,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고, 반대 입장의 시민과도 자주 논쟁을 했습니다. 지역에서 속보경쟁을 할 것도 아니고, 남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기보다는,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만날 수 있다는 기자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여 지역에서 입장과 대안을 마련하려 노력했습니다.

지역신문 기자로 재직할 당시 네덜란드 현지에서 기획취재를 진행하는 모습
지역신문 기자로 재직할 당시 네덜란드 현지에서 기획취재를 진행하는 모습

■ 궁금합니다. 사회적참사조사위원회로 근무하면서 무엇을 깨닫게 되었나요?

내가 아는 게 별로 없구나 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기자 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많은 민원과 정보를 접하고 한국언론재단 지원 등을 통해 해외취재나 각종 사건 등을 접하면서 그래도 이 사회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자부했는데 ‘내가 아는 게 다가 아니구나, 사회란 게 이렇게 어렵구나, 내가 모르는 세상이 아직도 너무 많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참위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을 한 분 한 분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청와대로 가려했던 적이 있었는데 밖에서 볼 때는 유가족들이 분노와 절망으로 청와대에 시위를 하러 가는 줄 알았겠지만, 당시 유가족들은 바쁜 대통령이 이 상황을 제대로 보고 받지 못해서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합니다.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이, 최고 의사결정권자들이 몰라서 그렇지, 이 억울한 사안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유족들과 당사자들의 말을 깊이 들어줄 거고 지금의 문제를 즉시 해결해줄 거란 믿음이 있었다 말했습니다.
유족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뿐만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던 평온하고 안온했던 이 세상이 실제와는 다른 곳이었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하는 것 같습니다. 가려진 세상의 일면을 참혹하게 깨달음에 유족들은 더욱 분노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이태원참사에 대응하는 행정의 과정이 세월호유가족을 대응하는 과정과 너무나 유사하다보니, 참사가 일어났을 때 행정이 사건을 묻거나 면피하는 수준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는 사실에 유족들과 시민들은 더욱 분노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섣부른 이야기처럼 들릴까봐 조심스럽지만 전적인 공감과 전적인 대처가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행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책임추궁’입니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이 책임을 누가 지지? 라는 질문이 사건과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행정을 경직시키거나 책임을 외면하거나 회피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책임에 대한 질문보다 대처와 대안, 시민들을 위한 안전장치에 대해 먼저 조치되어야 합니다. 행정과 언론, 사회 역시 책임을 추궁하고 검찰기소는 어떻게 하겠다는 등을 자동적으로 묻기 전에 사람, 생명을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누구를 어떻게 구하고 다친 사람을 어떻게 구하고 유족들을 어찌 위로하며 안전장치는 어찌 마련해야하느냐라는 질문과 과정을 책임추궁보다 먼저 떠올려야 합니다.

2018년 일본 도시재생 현장방문을 진행한 모습
2018년 일본 도시재생 현장방문을 진행한 모습

■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될 수 있을까요? 앞으로 어떤 일을 해보고 싶나요?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면 꼰대 같지만 사람들이 저마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내 아이들이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는 싫어하는데 억지로 일하고, 엄마는 죽지 못해 살고 이런 말을 자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내가 누구 땜에 이러고 사는데?’ 라거나 ‘나는 뭐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라는 티비 속 고성어린 대사들이 실제 가정 속에서 많이 오갔습니다. 우리 사회의 어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걸 숨기고 외면하며 억지로 오래 살았기에 오늘날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작년 말 경기도마을공동체지원사업의 작은연구지원사업을 통해 ‘공공커뮤니티 시설의 지역자산으로서의 가능성’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공동체에 대한 자생력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간의 지역공동체사업이 공공의 지원 하에 시민들의 참여가 주가 되었는데, 정권이나 정책 방향이 바뀌면서 사업이나 기관이 사라지거나 주민갈등으로 이어지는 걸 보며, 시민활동과 경험 역시 자생력을 갖추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들겠구나, 시민들이 앞으로 더욱 당당할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앞으로는 지역자산화에 대한 공부를 계속 해보고 싶고 지역 사람들의 문제를 들어보고 그 고민과 대안을 함께 만드는 해결사 같은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여전히 막연하지만 지역 문제와 갈등에 대해 들어주고 주민들을 북돋워주고 해결책을 함께 고민하는 '홍반장' 같은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 50대가 되어보니 어른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걸까요?

어른은 조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싫은 게 더 잘 보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누군가 못난 모습을 보이면 그걸 질타하거나 비난하기보다 나는 저러면 안 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됩니다. 저는 지역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일찍 꼰대가 되었습니다. 능력은 없는데 역할이 주어지다 보니 일찍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허세를 부렸던 것 같습니다. 당시 저는 어렸으니 주변 어른들이 허세인 걸 다 알면서도 많이 봐주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쪽팔립니다. 30~40대에는 몰랐는데 50대가 되고 보니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을까?’나 ‘자신감이 없어보여도 괜찮으니 차라리 조심조심 말하는 게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어른이라는 건 스스로와 상대를 배려할 수 있어야 하고,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존중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심 또 조심할 줄 알아야 합니다. 
 

■ 다시 청소년·청년 시절로 돌아간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해보고 싶나요?

저는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이 좋습니다. 어렸을 때도 젊었을 때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린 시절은 가난해서 힘들었고 젊었을 때는 절박해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 수밖에 없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일찍부터 허세를 부렸다 했는데, 이제 보니 스스로가 너무 왜소하고 가진 게 너무 없는 사람이다 보니 자꾸 허세를 부렸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조금 덜 허세부리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보고 싶습니다. 그래도 정말 다시 젊어진다면 공부를 대충대충 했던 게 조금 후회되는데, 학창시절이나 지역신문기자일 때 허세부리지 않고 세상과 사회, 그리고 스스로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처음부터 다시 공부했을 것 같습니다.
 

■ 뉴스와 지면을 통해 접하는 사회 속 다양한 갈등과 반목을 볼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드나요?

기자일을 하면서 훈련을 많이 했던 게 기사를 쓰는 일과 판단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사고가 단순사고인지, 흑막이 있는지 주어진 상황 속에서 판단을 하려 계속 연습했습니다. 뉴스를 보면 나의 경험과 지식에 비추어 여러 배경과 맥락 속에서 사건을 해석하고 그래도 의구심이 생기면 주변지인들이나 당사자한테서 직접 만나거나 연락하여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비록 한때 기자였으나 지금 나오는 방송이나 신문 등 언론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저는 신뢰를 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사건과 이슈 주변의 맥락에 대해 자주 고민하게 됩니다. 반목이 있다면 왜 저런 반목을 언론에서 자꾸 부각시키지? 라는 식으로요. 한국사회가 다양한 입장을 대변하다보니 수많은 갈등과 다툼, 고성과 난장판이 존재하는 게 자연스럽다 생각합니다. 다만 이게 대등하고 건강한 방식으로 토론되고 해소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 과정과 방식이 민주주의에 적합한 방식인가를 따져 묻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2015년 세월호조사관 재직 당시 조사위 강제종료 결정에 항의하며 단식을 진행하는 모습
2015년 세월호조사관 재직 당시 조사위 강제종료 결정에 항의하며 단식을 진행하는 모습

■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려 노력하고 있나요?

무얼 이루려고 특별히 노력한 건 없습니다. 그냥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대학 때 사회공부를 하면서 잠시나마 좋은 사회를 만들어보고 싶다, 이루고 싶다라는 시절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언가를 이루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무언가 주어졌을 때 ‘회피하지 말아야지, 도망가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자주 하며 살았습니다.
 

■ 자신의 부고를 남기는 심경으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나는 소멸하고 싶습니다. 내가 죽었을 때 나의 무언가가 이 세상에 남아있길 원지 않습니다. 저는 장기기증이 아닌 시신기증에 관심이 있습니다. 시신기증은 장례식 이후 병원에서 의료연구 등으로 시신을 알아서 쓰고 남은 시신은 알아서 처리한다 합니다. 마치 이 세상에 없었던 사람처럼 소멸하고 싶고, 그렇게 소멸할 자유가 저에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인공지능이 발달해서 내가 살아오며 만들었던 각종 정보나 사진 등 나의 모든 흔적들이 나의 사후에 말끔하게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죽었을 때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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