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김 정 호

2∼3
부섭이는 깊은 산골에 사는 소년입니다. 학교에서의 별명은 '깨장사' 또는 '깨구쟁이'입니다.
그 이유는 장난도 심하고 얼굴에 주근깨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애들은 '부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엄마 아빠는 그냥 '섭아'라고 부르십니다.
부섭이의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십니다. 그리고 다른 가족으로는 강아지 동이가 있습니다.

4∼5
"섭아, 빨리 일어나 학교가야지."
부엌에서 엄마가 부섭이를 깨우십니다.
"벌써 아침이네. 아침저녁이 이틀에 한번씩 바뀌었음 좋겠어."
부섭이는 눈 비비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습니다. 산마루에서 아침햇살이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마치 부섭이를 보고 '잠꾸러기'라고 놀리는 것 같았어요.

부섭이는 손나팔을 입에 대고 해를 향해 소리쳤어요.
"빨개쟁이 해야, 메롱!"
일찍 떠오른 해가 얄미웠기 때문입니다. 그 때 강아지 동이가 멍멍 짖으며 뛰어왔습니다. 뒤뜰 살구나무 위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릅니다. 엄마는 부엌에서 아침밥을 지으시고 아빠는 벌써 고추밭에서 일을 하고 계셨어요.

6∼7
아침을 먹으면서 아빠가 말씀하셨어요.
"부섭아, 학교 끝나면 곧 바로 오너라. 아빠가 너에게 선물로 줄 게 있단다."
"그게 뭔데요? 지금 주시면 안 돼요?"
그 때 엄마가 말씀하셨어요.
"섭아, 늦겠다. 어서 밥 먹어라."
"미리 얘기하면 재미없잖니? 학교 갔다오면 줄 테니 어서 밥 먹자."
"…… 예."
부섭이는 너무 궁금해서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8∼9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부섭이는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동이가 부섭이를 촐랑촐랑 따라갑니다. 파란 하늘아래 길게 뻗은 뚝길에 풀들이 훌쩍 자라 싱그러움을 뽐냅니다. 풀잎사이 거미줄엔 이슬이 송글송글 맺혀있고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햇살이 반짝입니다.
부섭이는 풀이름에 장단을 맞추어 학교에 갑니다.

까망 까망 까마중
엮어 엮어 여뀌풀
질겅 질겅 질경이
애기똥 별똥 애기똥풀

10
땡땡땡…학교 종이 울리고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부섭이는 선생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머리 속엔 온통 선물 생각뿐이었으니까요.
'혹시 자전거를 사 주실 꺼나? 키가 한 뼘 더 커야 사 주시겠다고 했는데…….'
부섭이는 우두커니 창 밖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집에 가면 살구나무에 다시 키를 재봐야지.'

11
드디어 수업이 끝났습니다. 급한 마음으로 교문을 막 나서는데,
"야, 깨장사! 만화 보러 갈래? 내가 자전거 타게 해 줄게."
'긴코' 삼열이였습니다.
"안 돼. 아빠가 학교 끝나면 바로 오라고 하셨어. 내일 봐."
부섭이는 뒤도 안 돌아보고 집을 향해 뛰었습니다.
'짜∼식, 자전거 태워 줄 테니까 만화 값 내라고? 그 속셈 내가 모를 줄 알아?'

12
부섭이는 한 달음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학교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집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습니다. 기대했던 자전거도 안 보이고 아빠도 엄마도 보이지 않았어요. 부섭이는 완전히 실망했어요.

13
부섭이는 살구나무에 기대어 키를 쟀습니다. 앗!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지난달에 그은 빗금이 부섭이의 키보다 오히려 더 높이 올라가 있었어요.
"어? 내 키가 줄어들었나?"
화가 난 부섭이는 살구나무를 힘껏 걷어찼습니다.
"아야!"
부섭이는 발이 아파서 콩콩 뛰었습니다. 그러자 동이도 따라 뛰었어요.
"부섭아!"
그 때 포도밭 쪽에서 아빠가 부르시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예."

14
달려가 보니 아빠는 포도밭 구석에 작은 밭을 만들고 계셨어요.
"부섭아, 이 밭이 바로 아빠가 너에게 줄 선물이란다. 이 밭에 도라지 씨앗도 뿌리고 포도나무도 키워 보련?"
"네? 자전거 선물이 아니었어요, 아빠?"
"자전거는 이 포도나무를 잘 키우면 그때 사주마."
아빠는 포도나무 가지 하나를 잘라 주셨어요. 부섭이는 어깨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어요.

15
하는 수 없이 부섭이는 작은 밭에 씨앗을 뿌리고, 포도나무 가지도 땅에 꽂았습니다. 그리고 물도 주었습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동이가 파헤치면 어쩌지?"
부섭이는 천방지축 동이가 걱정이었어요. 지금도 동이는 뭘 찾는지 열심히 땅을 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섭이는 나뭇가지를 세워 작은 울타리를 만들었습니다.

16
그런데 저녁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빗물에 씨앗이 씻겨 내려가면 어쩌지?'
씨앗을 심고 나니 부섭이는 걱정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그 때 아빠가 돌아오셨습니다.
"아빠, 우리 밭 괜찮아요?"
"허허허… 우리 부섭이가 농부가 다 되었구나. 그런 걱정을 다하고……괜찮아. 걱정 말고 자거라."

17
다음 날 아침에도 비는 계속 내렸어요. 부섭이는 작은 밭이 걱정되어 우산을 쓰고 달려갔어요. 비 때문에 나뭇가지 울타리가 쓰러져있었어요. 그래도 포도나무 가지는 꿋꿋하게 서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18
'씨앗들도 모두 무사할까?'
부섭이는 걱정스런 마음에 쓰러진 나무 울타리를 다시 세웠어요.
그 때 동이가 와서 작은 밭의 흙을 앞발로 긁어내렸어요.
"야, 임마! 저리 안 가!"
부섭이는 화가 나서 동이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어요.
"깽!"

19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온 부섭이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와! 싹이 돋아났다."
부섭이는 가슴 한 구석에서 붉은 해가 불끈 솟아나는 것 같았어요. 새싹이 돋다니……. 정말 신기했습니다. 부섭이는 밭고랑에 쪼그리고 앉아 일어설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언제 이 싹이 자라길 기다리지?'
그 때 엄마가 부르셨어요.
"섭아, 손 씻고 밥 먹자."
"예. 알았어요."

20∼21
그날 밤 부섭이는 꿈을 꾸었습니다.
포도나무 새싹이 '재크의 콩나무'처럼 하늘 높이 쑥쑥 자라는 꿈이었어요.
포도나무 줄기가 꿈틀꿈틀 자라나더니 무성한 잎이 하늘을 덮고 순식간에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열렸어요. 부섭이는 포도나무 줄기를 타고 올라가 포도를 실컷 따먹었어요. 정말 신나는 꿈이었어요.

22
부섭이는 꿈에서처럼 포도나무가 순식간에 자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뿌리도 내렸을까?'
부섭이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가지를 살짝 뽑아봤어요. 그런데!!
"에게! 이게 뭐야? 뿌리가 없잖아. 괜히 뽑아봤네."
부섭이는 얼굴을 찡그렸어요.

23
부섭이는 다시 포도나무를 땅에 꽂았어요.
'싹이 빨리 자라야 자전거 선물을 받는데…좋은 방법이 없을까?'
문득 아빠가 밭에 비료를 뿌리시던 게 생각났어요.
'맞아! 비료를 주면 잘 자랄 거야.'
부섭이는 헛간으로 뛰어갔어요.

24
다시 작은 밭으로 돌아온 부섭이는 포도나무에 비료를 뿌렸어요. 또 물에 타서 뿌려주기도 했어요.
"빨리 빨리 자라라, 포도나무야."
비료를 주면서 부섭이는 줄곧 자전거 선물을 생각했습니다.
'삼열이 녀석, 긴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어야지!'
새 자전거를 탄 자신을 보고 삼열이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을 하니 가슴이 뿌듯하고 마구 설레었어요.

25
그 광경을 엄마가 보고 말씀하셨어요.
"섭아, 비료 함부로 주면 안 된다. 많이 주면 뿌리도 썩고 잎도 말라버려."
순간 더럭 겁이 난 부섭이는 서둘러 흙을 걷어내고 물로 씻어주었죠.

26
그러나 안타깝게도 포도나무는 결국 죽고 말았어요. 잎이 조금씩 마르기 시작하더니 며칠 후에는 완전히 갈색으로 변해버렸어요. 부섭이는 속이 상해서 밭고랑에 주저앉아 '으앙' 울음을 터트렸어요.
"섭아, 무슨 일이니?"
"아빠∼!"
부섭이는 더 크게 울었습니다.
"포도나무가 죽어버렸어요."

27
"저런! 포도나무를 너무 많이 괴롭혔구나."
아빠 말씀에 부섭이는 너무 억울했어요.
"아니에요. 괴롭히지 않았단 말야. 빨리 자라게 하려고 비료도 줬어요."
부섭이는 주먹을 움켜쥐고 항의하듯 소리 쳤습니다.
"그래, 그랬구나. 하지만 비료는 영양제가 될 수도 있지만 많이 주면 독이 된단다. 그리고 사람 손을 많이 타면 안 좋아. 그냥 놔두어도 스스로 잘 자라지."

28∼29
그런데 정말 아빠 말씀이 맞았어요. 부섭이가 돌보지 않은 도라지는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었으니까요. 부섭이는 그나마 도라지가 잘 자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도라지가 자라는 사이에 여름이 갔어요. 결국 부섭이는 여름이 지나도록 자전거를 받지 못했습니다.

30
가을이 되자 작은 밭 가득 도라지꽃이 피었습니다. 부섭이는 예쁜 도라지 꽃밭의 주인이 되었지요. 부섭이는 활짝 핀 도라지꽃을 보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포도나무는 자전거를 갖고 싶은 내 욕심 때문에 죽은 거야. 내년 봄에 다시 포도나무를 심어야지."

31
부섭이는 다시 살구나무에 기대어 키를 쟀습니다. 살구나무의 빗금은 여전히 키보다 높았어요. 그 때 부섭이의 머리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옳지! 땅을 높이면 되겠다."
부섭이는 흙으로 자그마한 둔덕을 만들었어요. 둔덕에 올라서자 눈 높이가 빗금과 같아졌습니다.
"우하하…키가 커졌다. 이제 키가 커졌으니 자전거를 사달래야지."

32
부섭이는 살구나무 아래 앉아 새 자전거를 탄 자신의 모습을 상상 해보았습니다.
"삼열이 녀석, 분명히 이렇게 말하겠지?
야, 깨장사! 장날에 깨 팔았냐? 웬 자전거?
그럼 나는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래, 임마! 아빠가 참깨하고 내가 키운 도라지 팔아서 자전거 사 주셨다. 어쩔래?"
삼열이의 긴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생각을 하니 부섭이는 웃음이 절로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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