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방학

송원석 양일중 교사
송원석 양일중 교사

[고양신문] 새해에도 어김없이 거실 책장에 가득한 각종 기록물과 서적을 정리하라는 아내의 요구가 시작됩니다. 몇 번 시도했지만 버리지 못한 청춘의 기록은 창고에 쌓일 뿐 다시 새로운 기록들이 공간을 채웁니다. 이번에는 큰마음 먹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버릴까 정하다 보면 다시 제자리일 것 같아 버릴 양을 정했습니다. 각종 서류는 전량 폐기, 서적은 최소 200권, 하루면 될 줄 알았는데 3일이 지나도 반이나 남았습니다.

오늘은 꼭 끝내리라 다짐하고 책장 위 먼지 쌓인 서류 뭉치를 꺼내다 투명 파란색 클리어 파일이 떨어지며 머리에 쿵. 펼쳐진 첫 장 제목에 시선이 멈춥니다. ‘사랑의 십계명, 2003년 2월 15일’ 결혼식 주례사였습니다.

귓가에 자탄풍(자전거 탄 풍경)이 부른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이 이명처럼 들립니다. 지금은 주례사 자체가 거의 없어졌지만 제가 결혼했던 20년 전에는 필수코스였지요. 결혼식이 잡히고 부랴부랴 아내와 함께 은사님을 찾아뵌 후 주례를 부탁드렸고 저를 많이 아끼셨던 선생님은 한번에 수락하셨습니다. 결혼식 당일, 1시간이나 일찍 오신 선생님은 그 파란색 클리어 파일을 펼치시고 모두 10장의 주례사를 읽으셨습니다. 제목이 사랑의 십계명이니 한 계명당 1장인 것이지요. 

근처 호프집을 빌려 진행한 피로연에서 만취하기 전 들려온 목소리들이 기억납니다. 
“원석아, 주례사가 너무 길어서 당구를 치고 왔는데, 아직도 주례사를 하고 계시더라구^^”
“야, 선생님이 10번째 하시는데, 방학식 끝나는 기분을 다시 느꼈지 뭐야? 그런데 어른들은 엄청 경청하던데, 고개도 끄덕이시고 말이야.”

1시간 수업을 해주신 은사님 덕분에 지금도 회자되는 결혼식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주례사를 10장이나 준비해주신 줄 몰랐습니다. 당연히 내용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요.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작은 선물에도 너무 기뻐하신 선생님은 서재에 들어가셔서 문제의 그 파란색 클리어 파일을 제게 내어주셨습니다. 이사를 4번 하는 동안에도 남아있는 것을 보니 선생님의 당부대로 살지 못했나 봅니다. 

20년 만에 다시 읽어 본 사랑의 십계명에는 선생님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었고, 당부가 아닌 고백이었습니다. 다시 읽는 20분의 시간 동안 제자는 20년의 삶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3월에 만날 제자들을 위해 다짐해 봅니다. 

불안한 미래로 고민하는 아이를 만나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안내하고, 그것으로 작은 성취가 있다면 누구보다도 기뻐하며 혹여 실패하더라도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람이 되어보자/ 관계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는 아이를 만나면 친절하고 명랑한 친구가 되어 주자/ 학급으로, 모둠으로, 번호로 인식하지 말고 온전한 하나하나의 생명으로 대해 주자/ 그들의 도전을 응원하고 힘든 일상을 살아내는 교복 입은 시민에게 감사를 표하자/ 발상의 전환이 가능한 질문을 던져 주고 그 어떤 답변에도 긍정적인 피드백을 던져 주자/ "그렇게 온전히 사랑을 나누자!"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