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가파도 편지 4

[고양신문] 지난 여름 가파도에 한 달 머물면서 키웠던 고양이가 여섯 마리였습니다. 집안에 들여 돌보던 것을 마당으로 내몰고 길렀지요. 인간인 내 입장에서 보면 집안의 청결과 보건을 위한 불가결한 조치였지만, 고양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별안간에 집에서 내쫓긴 신세가 된 것입니다. 집냥이에서 마당냥이로 추락한 것입니다. 올해 가파도 매표소에 취직하여 집 한칸 임대하여 살고 있는데, 마당에 고양이급식소가 있습니다. 동네를 떠돌아다니는 길냥이들을 위한 장소지요.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하루에 한 번씩 밥그릇과 물그릇을 채워줬는데, 찾아오는 고양이들이 점점 늘어나 배급 받은 사료가 금세 소진되었지요. 

그렇게 한두 달 고양이들을 먹이다보니 낯익은 고양이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내가 작년에 돌보던 고양이 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어쩌다 자기 집을 놔두고 내 집에 와서 밥을 먹는 걸까요? 주변에 수소문해 본 결과, 고양이를 키우던 주인이 섬 밖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고양이들이 버려진 것입니다. 집냥이에서 길냥이로, 금지옥엽에서 비렁뱅이가 된 것이지요. 마음이 짠해져서 보급 받은 건식사료 말고 마트에서 습식사료를 사비로 마련하여 주말마다 특식조로 먹이고 있습니다. 사료 캔 따는 소리에 뛸 듯이 기뻐하는 고양이를 보면 더욱 마음이 어릿해집니다. 거지가 된 귀족을 보는 것 같습니다.

가파도에도 고양이를 달가워하지 않는 주민들이 많습니다.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을 보면  “사람 먹을 것도 없는데...”하면서 혀를 끌끌 차기도 합니다. 고양이를 보호하기보다 외면하고 혐오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시선에서 보자면, 고양이는 쓰레기통을 뒤져 동네를 더럽히거나, 잡아놓은 물고기를 몰래 도둑질해가는 더럽고 추잡한 동물에 불과합니다. 

설상가상으로, 고양이를 지원하는 공공예산이 줄어들어 이제는 시차원에서 실시했던 지원도 끊어진다고 합니다. 부자 감세로 결손된 세수를 노동자 근로소득 증세로 메우고, 각종 지원예산을 감축하여 온 국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현 정부의 무능력이 미치는 파장은 인간 세상만이 아닙니다. 경제적 고통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맨 아래층에 동물이 있습니다. 인간은 지어먹든 벌어먹든 빌어먹든 생존의 길이 여럿 있지만,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동물들은 빌어먹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주인이 있어 대접 받으며 빌어먹느냐, 주인이 없어 추레하게 빌어먹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나 부처가 위대해지는 과정에는 그를 지원해주고 보호해줬던 보이지 않는 다정하고 친절한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손길 때문에 그들은 비렁뱅이 신세를 넘어 성인(聖人)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동물들을 성물(聖物)로 만들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물이나 인간이나 결국은 비렁뱅이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공기를 빌어먹고, 물을 빌어먹고, 풀을 빌어먹고, 열매를 빌어먹고, 고기를 빌어먹고, 몸을 빌어먹고, 마음을 빌어먹고, 사랑을 빌어먹고 살아갑니다. 그 빌어먹음이 일방적일 때 생존은 불가능해집니다. 서로가 서로를 빌어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가족이라 했고 공동체라 했고 마을이라 했습니다.

가파도로 내려와 생명의 연쇄사슬에 묶여 살아갑니다. 하늘과 땅은 나에게 고양이와 더불어 살라고 인연을 묶어줬습니다. 휴먼카인드(Humankind)인 나는 다정하고 친절하게 주민을 맞이할 뿐 아니라 고양이들도 맞이하려 합니다. 공공예산이 깎여 결국은 내 먹거리를 줄여 고양이 먹거리를 마련해야 하는 시간이 오면, 그 또한 다정하고 반갑게 맞이하려 합니다. 그래야겠습니다.
 

김경윤 인문학자
김경윤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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