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기 ㈜더채움 대표 - 70세 앞두고 석사·명예박사 학위 받아

고교 졸업 후 상경해 일터로
장사꾼에서 사업가로 성장 
50대 후반 시작한 대학공부
경영학 석사와 명예박사까지
중부대 겸임교수로 후학 양성
“도전과 봉사의 삶 이어갈 것” 

권영기 ㈜더채움 대표(사진 가운데)가 지난달 15일 중부대학교 2023학년도 전기 학위수여식에서 가족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권 대표는 “자식들과 손주 손녀에게 늘 공부하고 연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교육이라고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권영기 ㈜더채움 대표(사진 가운데)가 지난달 15일 중부대학교 2023학년도 전기 학위수여식에서 가족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권 대표는 “자식들과 손주 손녀에게 늘 공부하고 연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교육이라고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고양신문] “대학에 갈 수 있는 형편이 안돼 어린 시절부터 산업현장에 뛰어들었습니다. 패기와 열정을 바탕으로 일에 몰입했고, 국민 건강에 이바지하겠다는 신념 하나로 사업을 일궈냈습니다. 배움에 대한 갈망이 너무나 컸어요. 50대 중반을 넘겼을 때 대학에 입학해 60세에 졸업했습니다. 최근 2년간은 대학원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이제 70세를 막 눈앞에 두고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게 됐는데, 이렇게 명예박사까지 받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앞으로 국가와 사회 그리고 지역발전을 위해 헌신하라는 의미로 알고 더욱 정진하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드립니다.”

지난달 15일 열린 중부대학교 2023학년도 전기 학위수여식 현장.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답사를 하던 권영기 더채움 대표는 중간에 감격에 겨운 듯 잠시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간 살아온 긴 세월을 생각하면서 회한에 잠긴 듯했다. 

아내와 아들딸은 물론 손주 손녀도 졸업식 무대에 올라 꽃다발을 한 아름 건네면서 권 대표를 축하하는 모습을 보며 불현듯 정현종 시인의 시구가 머리에 떠올랐다. “사람이 온다는 건 /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부서지기 쉬운 /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마음’을 ‘환대’하고 싶었다. 따로 인터뷰를 청했다. 

지난달 26일 더채움 사무실을 찾았다. 사업에 한창 바쁜 가운데에서도 느지막이 논문까지 써가며 석사학위를 받게 된 이야기, 시장 상점 점원에서 시작해 하루 한 줌 먹는 것이 어느새 우리의 일상이 된 견과류 관련 사업을 이끌어 오게 된 이야기들을 듣다 보니 중부대 졸업식 날처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사진 오른쪽부터) 이정열 중부대학교 총장이 권영기 더채움 대표와 박종찬 파주상공회의소장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부터) 이정열 중부대학교 총장이 권영기 더채움 대표와 박종찬 파주상공회의소장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있다.

일터에서 연 20대 청춘 시절  
권영기 ㈜더채움 대표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밑으로 딸린 동생들이 각각 8살, 11살, 15살 터울이다 보니 키우다시피 했다. 낮에 생계를 위해 나간 부모님을 대신해 열 살부터 실질적 가장 생활을 한 것이다. 그렇게 단칸방에서 여섯 명이 살았다. 

1956년생이니 권 대표는 내년이면 70세가 된다. 어찌 보면 삶을 되돌아보고 정리하며 이젠 좀 여유로운 인생 후반부를 보내고 싶을 나이 아닐까 싶은데, 이야기를 들을수록 에너지 넘치는 사업가로 영원히 현장에 남아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친구들이 대학에 갈 때 일터에서 20대 청춘을 열었다. 빨리 돈을 벌어 가난에서 탈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평생 자신의 집을 가져 보지 못한 부모님의 ‘내 집 마련이라는 한도 풀어주기 위해 도전에 나섰다. 1992년 마침내 부모님께 집을 사드리고, 1997년엔 자신도 집을 마련했다. 그렇게 생활이 안정되니 사업 역시 안정화되어 갔다. 

학교 문을 나선 지 30여 년 만인 57세에 대학공부를 시작했다. 대학에 못 갔던 젊은 시절의 회한이 늘 가슴 한구석에 남아있었지만, 대학에 덜컥 입학하게 된 이유와 계기는 단순했다.

“어느 날 아침 고양신문을 폈는데 경기대학교 평생교육원 경영학부에서 주말 특별 학사학위 취득과정 학생 모집 광고가 있는 거예요. 학교에 전화해 이런저런 사항을 물었죠. 그런데 그날 오후 학부장인 이택호 교수님이 직접 회사로 찾아왔습니다. 상세히 설명을 해주시며 공부를 권하더군요. 그 자리에서 바로 입학하겠다고 등록금을 내버렸습니다. 제가 원래 도전적인 성격인 데다 ’이것이다‘ 싶으면 주저함 없이 바로 결정해버리거든요. 좋게 보면 기회가 왔을 땐 놓치지 않는 것일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무모한 성향인 거죠(웃음). 만 하루도 안 돼서 했던 결정 같지만, 제 마음속에 늘 품고 있던 배움에 대한 갈망의 세월을 더하면 사실은 몇십 년이 걸린 셈입니다.”

중부대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에서 아내와 함께 기념촬영을 한 권영기 더채움 대표
중부대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에서 아내와 함께 기념촬영을 한 권영기 더채움 대표

무모할 정도로 도전적인 삶
그의 무모함은 고등학교 졸업 후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혈혈단신 서울로 상경했을 때, 그 후 1년 반 만에 당시론 큰 금액인 100만원을 모아 비행기 타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을 때, 부산에서 맞춤옷 가게, 카페, 횟집, 등을 운영하며 장사가 잘 되다 보니 자금을 끌어모아 각종 사업을 마구 벌이다 폭삭 망해 먹은 20대 초반부터 이미 시작됐는지 모른다. 그중 압권은 30대 후반인 1992년 프랑스 파리 국제 식품 박람회(SIAL FRANCE)에 참가하게 된 일이었다.

“견과류 업계에서 일하며 세계시장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일하는 회사에서는 관심이 전혀 없고 또 지원도 안 해준다고 하더라고요. 무작정 프랑스 대사관을 찾아갔죠. SIAL FRANCE에 꼭 가보고 싶은데 대사관 측에서 박람회 초청 등 무료로 갈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 달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대사관 담당자인 상무관이 어이없다는 듯 상대도 안 해주더군요. 거의 매일 찾아가 사정했습니다. 몇 달을 그렇게 하니 나중엔 상무관이 커피도 내주고 밥도 같이 먹게 됐어요. 그분이 어떻게 했는지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결국 박람회 초청장을 받았고, 6박 8일간 일정으로 파리 박람회에 가게 됐어요. 별천지더군요. 쉬지 않고 매일 전시장을 찾아 샘플을 구하고 귀동냥 눈동냥을 했습니다.”

프랑스어는 물론 영어조차 한마디 하지 못했던 그는 혼자서 파리 시내를 거침없이 활보했다.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하고 에펠탑에 오르고 센강에서 유람선을 타며 자유를 느꼈다. 말 한마디 못해도 언제든 무엇에든 도전할 수 있다며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파리에서의 그런 경험은 견과류 업계에서 꿈을 키우겠다고 다짐하는 원동력이 됐다.         

낮·밤·휴일 없는 ‘N잡러’ 생활
사업 실패 후 빈털터리가 된 그는 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점원 생활을 시작했다. 마네킹 상점, 가구회사 등을 거쳐 중부시장에서 건어물과 견과류를 파는 회사에 들어갔다. 경기도 양주에 공장을 두고 직원이 100여 명이나 되는 꾀나 큰 회사였다. 하지만 회사 운영은 주먹구구식이었다. 돈이 숭숭 새는 것을 보다 못한 그는 차량운행일지, 업무일지 등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관리에 나섰다. 이를 지켜본 사장의 신뢰를 얻었고, 부장, 이사로 승진을 거듭한 끝에 사실상 회사의 2인자가 됐다. 

그런 와중에도 저녁에는 앵글을 조립하는 일을 했고, 또 일요일에도 가구조립 기술을 바탕으로 출장을 나가는 등 쉼 없이 일했다. 요즘 말로 하면 ‘N잡러’였던 셈. 그렇게 일해서 모은 돈으로 멸치, 김 등 건어물을 생산 시기에 사서 몇 달 뒤 상당한 이윤을 남기고 판매했고 차곡차곡 자금을 모았다. 

나중엔 근무하던 회사의 공장을 자신이 인수하기로 계약서까지 썼다. 세상에 순탄한 일이 없다는 건 진리일 터. 사장이 자신의 동생에게 공장을 넘기기로 했다며 계약을 파기했고, 사장과 일 처리 방식의 차이로 대립하는 날도 계속됐다. 마침 IMF 외환위기가 터지자 어쩔 수 없이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그러나 위기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권영기 더채움 대표.
권영기 더채움 대표.

IMF 외환위기는 오히려 기회 
“지금 생각해보면 천만다행이었죠. IMF가 없었다면 아마 저도 계속 월급쟁이로 지금도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에 환율이 급등하면서 모든 물건값이 두 배가 됐는데 저는 IMF가 터지기 전 확보해놓은 물건이 있었고, 또 가락시장에서 오징어, 한치, 북어 등 건어물과 견과류를 경매로 떼서 파는 일과 견과류 수입판매를 병행하며 연 매출 200억원을 올릴 정도로 장사에 수완을 보였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전 회사 사장의 방해로 다른 사람보다 도매가를 높게 쳐줘야만 물건을 구매할 수밖에 없는 힘든 시기도 겪었다. 그래도 손해를 보면서 꾸준히 팔았더니 잘 판다는 소문을 듣고 나중엔 싸게 물건을 공급해주겠다는 도매업자가 전국에서 찾아왔다. 그런 일을 계기로 권영기 대표는 규모의 경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눈속임이나 바가지 없이 5%라는 적정 이윤을 내고 사업을 펼치겠다는 원칙을 바탕으로 도매업으로 성장했다.

한국 견과류 문화를 바꾸다
짜지 않고 기름에 튀기지 않는 견과류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꿈을 안고 2002년 경기도 하남시에 작은 임대공장을 얻어 직접 제조생산에도 나섰다. 2007년엔 고양시 일산동구 설문동 400평 규모의 공장으로 옮겼고, 올해는 성석동에 대지 3000평에 건평 1300평인 공장을 신축해 이전했다. 한국에서 지금과 같은 무염 견과와 하루 견과가 생활화된 것도 권영기 대표의 관찰과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서양사람들의 주식은 고기, 야채, 빵이잖아요. 소금섭취가 별로 없다 보니 견과류나 비스킷, 피자 등 간식은 짜게 먹게 되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주식인 국이나 반찬에 염분이 이미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 견과류마저 짜게 먹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염 견과류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매일 건강한 하루 견과 섭취량 25g에 초점을 맞춘 ‘E 25gram(하루 한 줌 견과)’도 세계 최초로 출시했죠. 그 이후 견과류 소비 시장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국내에 하루 견과 소비는 유행처럼 퍼졌어요. 제가 무염 견과와 하루 견과라는 ‘문화’를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이유입니다. 하루하루 소포장으로 먹는 견과 시장이 열리면서 시장규모도 더욱 커져 지금은 3조원 가량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더채움은 견과 세계 1위 업체인 미국 파라마운트 팜즈와 OEM 계약을 맺고 13년째 납품을 이어오고 있으며 선키스트, 삼양사, 삼육식품, 코스트코, 천호식품, 쿠팡(OEM) 등에 납품·판매되는 국내 최초 하루 견과 출시업체다.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명품 견과 제조업체로 업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 23일 열린 경기대학교 학위 취득 축하행사 모습.
지난 23일 열린 경기대학교 학위 취득 축하행사 모습.

일하며 봉사하는 삶 이어갈 것
권영기 대표는 ‘견과 식품의 구매동기와 제품 특성이 고객 만족과 재구매 의도에 미치는 영향-소포장 하루 한 줌 견과 식품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경영학 석사학위 논문이 통과돼 지난달 23일 경기대학교 학위수여식에서 총장상을 받았다. 중부대에서는 지역협력 교육자문위원으로서 중부대학교와 지역협력을 위해 본인의 전문지식과 노하우를 전달하고, 고양시 사회복지협의회 운영위원으로서 복지 분야에서도 힘씀으로써 중부대의 건학정신인 ‘성실하고 창조적인 인재양성’에 부합된다고 판단돼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영광도 안았다.

“이번에 후보자가 총 8명인데 그중 박종찬 파주상공회의소장과 저 딱 2명만이 심사를 통과해 명예박사 학위를 받게 됐다고 하더군요. 과분하고 부담되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제가 가진 인생의 경험과 경륜을 후학들에게 전하고 사회에 기여하라는 의미로 알고 더 열심히 일하고 강의하고 봉사하는 삶을 잘 작정입니다. 특히, 미래 우리 사회의 주인공인 젊은 청년들에게 일과 사업을 통해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제 경험을 나누며 자존감을 불어넣어 주며 응원하고 싶습니다. 도전적으로 또 때로는 무모하게 살아온 저의 지나온 날들. 그 시간이 청년들에게 잘 스며든다면 앞으로 그들이 새로운 시디에 새 열매를 맺는 좋은 밑거름으로 분명히 작용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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