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신문] “역사는 과거의 정치고 정치는 현재의 역사”라는 영국의 역사학자 실리의 말처럼 역사와 정치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고래로 수많은 정치인들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정치 투쟁에서 자신의 주장과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를 끌어들였다. 본래 역사란 현재의 관점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새로운 의미가 덧붙여지기에 역사 해석을 두고 정치 투쟁을 벌이는 행위 그 자체를 탓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금기가 있다. 역사적 사실 그 자체를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는 이러한 금기를 깼다.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용했는데 그 맥락을 무시한 채 본뜻을 심하게 왜곡시켰다. 

3.1절 기념사를 하는 윤석열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 유튜브 채널 캡쳐]
3.1절 기념사를 하는 윤석열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 유튜브 채널 캡쳐]

3·1운동 정신이 자유주의라는 주장 

윤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3·1운동의 정신이 자유라고 주장했다. <기미독립선언서>의 “우리 민족이 영원히 자유롭게 발전하려는 것이며, 인류가 양심에 따라 만들어가는 세계 변화의 큰 흐름에 발맞추려는 것이다”를 인용해 3·1운동의 뿌리에 세계사의 큰 흐름인 ‘자유주의’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와 정부는 3·1운동의 정신인 자유의 가치를 지키며 더 행복하고 풍요로운 대한민국 건설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다짐한다.

<독립선언서> 원문의 첫 문장은 “우리는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인류평등의 대의를 밝히고 민족 자존의 권리를 영구히 누릴 수 있게 한다.”이다. 그리고 다음 문장은 “민족의 영원한 자유발전을 위하여 제기하는 것”으로 “세계 변화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독립선언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독립’과 ‘자주’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3·1운동의 정신은 ‘독립’이라고 해야 맞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이 말을 쏙 빼고 뜬금없이 ‘자유주의’가 그 핵심 정신이라고 주장한다. 어설픈 윤 정부의 이념 과잉이 이제 3·1운동정신까지 훼손시키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독립선언서>에서 말하는 자유란 개인의 자유보다는 민족 차원의 자유이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윌슨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를 의식해 사용한 용어이다. 각 민족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민족자결주의’는 민족해방운동을 벌이고 있던 피식민지 대중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열렬히 호응을 받았던 시대정신이었다.   

이해·공감을 토대로 일본과 새 세상을 열자는 주장

윤 대통령은 <기미독립선언서>가 “일본을 향해 우리의 독립이 양국 모두 잘사는 길이며, 이해와 공감을 토대로 ‘새 세상’을 열어가자고 요구하고 있습니다”라며, “한일 양국은 자유·인권·법치의 가치를 공유하며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습니다”라고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고 있다. 

<독립선언서> 원문은 첫 단락에서 일본의 침략주의 · 강권주의로 인해 우리 민족의 생존권이 박탈되고 정신 발전이 지장받고 민족적 존영이 훼손되고 독창성으로 세계문화에 기여할 기회를 상실했다고 진단한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우리의 최우선 과제가 민족적 독립이기에 일본의 무신(無信)과 소의(小義)를 책망하지 않겠다며, 우리의 소임은 파괴가 아닌 건설이라고 천명한다. 그리고 일본 당국에게 이천만 조선민족의 염원을 힘으로써 억누르려 한다면 4억 중국인의 의구심을 키워 동양 전체가 공멸하는 결과를 가져와 동양 평화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조선 독립이야말로 조선인뿐 아니라 중국인의 불안·공포감을 없애고 일본에게는 동양 평화의 책무를 다하게 해 동양 평화와 세계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윤 대통령 기념사의 한일관계 언급은 마구잡이식 <독립선언서> 훼손이다. 문맥도 무시하고 내용도 왜곡한 채 필요한 구절만 따와 아전인수로 해석했다. 한일관계 정상화 과정에서 윤 정부가 보였던 굴욕적 행태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의식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인 것 같은데, 하필 3·1절 기념사에서 이렇게까지 해야 되겠는가.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는 위안부·징용자 등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에 대한 위로 한마디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자유·인권 가치를 확장하는 게 통일이라는 주장

윤 대통령은 3·1운동은 통일로 완결된다며 통일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북한의 억압통치를 비판하며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의 가치를 확장하는 것이 바로 통일입니다”라고 주장한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기자들에게 기념사 취지를 부연 설명하며 ‘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 “우리가 지향하는 자유주의적 철학과 비전이 누락돼 있다”며 “윤석열 정부의 통일관과 통일 비전을 보다 구체화하는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노태우 정부 이래 역대 정부의 통일정책인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자주·평화·민주의 3대원칙 하에 화해협력-남북연합-통일국가완성의 3단계 통일을 추진하겠다는 정책이다. 그 기본정신은 남북 간 교류·협력을 바탕으로 민족공동체를 형성해 점진적으로 통일을 추진한다는 것인데, 그 배경에는 1990년대 풍미했던 ‘기능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기능주의’(functionalism)란 유럽통합 과정에서 먼저 과학기술·경제·사회적 분야에서부터 교류·협력을 증대시키면 파급효과(spill over)가 발생해 민감한 군사·정치 분야까지 통합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견해이다. 여기서 파급은 풍요한 곳에서 빈곤한 곳으로 향하기 때문에 북한은 이 정책을 흡수통일로 보고 경계하고 비난해 왔다.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최대 난관은 정경(政經) 분리를 실천할 수 있느냐 여부였다. 이 정책이 성공하려면 남북 간 교류·협력이 끊임없이 진행돼야 하는데, 그간 군사·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가다 서다를 반복하였다. 김대중 정부 외에는 정경 분리를 제대로 실천한 정부가 없었다. 결국 이 정책은 남북 간 군사적 충돌, 북핵 문제로 이명박 정부의 5·24 조치, 박근혜 정부의 개성공단 폐쇄 조치를 거치며 교류·협력이 전면 중단됨으로써 현재 껍데기만 남은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윤 정부는 ‘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 자유·인권 등의 용어를 추가해 흡수통일 인상을 더 짙게 하겠다고 한다.    

백장현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운영연구위원장

해야 될 일은 안 하고 안 해야 될 일만 기를 쓰고 하는 윤석열 정부를 보는 마음 착잡하기만 하다. 윤 정부의 각성과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다가올 총선에서 국민의 매서운 회초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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