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 작가
이인숙 작가

[고양신문] 스페인의 남쪽 도시 그라나다 하면 대부분 아름다운 알함브라 궁을 떠올리지만 나는 십여 년 전에 보았던 거리의 빈 가게들과 유리창에 펄럭이던 광고지가 먼저 떠오른다. 그 시절 스페인은 경제 위기로 힘들었던 때였다. 시내 중심지를 벗어나 외곽에 있던 호텔에 들어갈 때면 빈 점포들의 쇼윈도에서 광고지들이 펄럭이던 스산한 거리 모습이 스페인의 경제 위기를 실감하게 했다. 그런데 요즈음 서울을 걷다보면 그때의 광경이 떠오른다. 번잡한 시내를 벗어나면 풀이 죽은 거리의 모습이 힘겨운 자영업자들의 얼굴처럼 보이는 것이다. 몇 번 다녔던 동네의 식당도 간판을 내렸다. 음식이 나쁘지 않았는데 결국은 버티지 못한 것이다. 자영업자들은 코로나 시절보다 더 어렵다고 비명을 지른다. 

  직장인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점심시간에 시내 중심가의 마트에 들렀다가 한 귀퉁이에서 마트 음식으로 점심을 때우는 젊은 직장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식당의 밥값이 너무 올랐기 때문이다. 시장 물가도 얼마나 올랐는지 장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그 흔하던 사과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게 된다. 자영업자도 소비자도 이렇게 어렵지만 정부에서 무슨 대책을 내놓았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그냥 알아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라고 한다. 길을 걷다가 수백 명이 압사해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면 물에 잠길 것 같은 지하 차도는 알아서 피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차안에 갇혀 익사할 수 있다. 도대체 정부라는 존재는 왜 있는 것인가. 우리가 세금내서 나라일 하라고 맡겼는데 이것은 직무 유기가 아닌가. 

켄 로치 감독이 88세라는 나이에 내놓은 영화 '나의 올드 오크' 포스터.
켄 로치 감독이 88세라는 나이에 내놓은 영화 '나의 올드 오크' 포스터.

 최근에 영국 노동자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온 켄 로치 감독이 88세라는 나이에 <나의 올드 오크>라는 새로운 영화를 내놓았다. 폐광촌의 고달픈 주민들과 어느 날 갑자기 트럭에 실려 온 시리아 난민들과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 작품이다. 골치 아픈 난민들을 폐광촌에 보내버림으로써 문제를 손쉽게 해결하고 약자들끼리 갈등을 유발하는 정부의 처사는 분노를 자아낸다. 영국 보수당 정부의 비인간적인 노동복지 제도를 비판하는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무료 음식을 받은 여성이 배고픔을 참지 못해 한쪽 구석에서 통조림을 따서 음식을 먹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영국 택배기사의 고달픈 삶을 보여주는 <미안해요, 리키>는 개인 사업자로 분류돼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택배 기사의 현실이 한국의 상황과 너무 흡사해 남의 얘기 같지 않았다. 이번 영화까지 해서 노감독은 노동자의 영화 삼부작을 완성한 셈이다. 그러나 켄 로치의 영화에 노동자들의 힘겨운 삶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가족을 지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몸부림, 약자들끼리 서로 돕고 연대하는 모습은 따뜻한 희망의 불씨를 보여준다.   

  켄 로치는 영국 정부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힘 있고 부유한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 정부를 한국 정부로 바꾸면 그대로 우리의 현실이 될 것이다. 다른 세상도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사실을 영화를 통해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감독의 말처럼 각자도생의 각박한 시대에 다른 세상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약자들의 연대가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은가. 

  그러나 약자들의 연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힘없는 노동자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정부의 무관심, 비인간적인 관료제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택배기사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제도를 바꾸라고 주장하고, 가난한 폐광촌에 난민들을 짐짝처럼 부려놓는 정부의 처사에 항의하고 마을 사람들과 난민들이 연대하여 대책 마련을 강하게 요구해야 한다. 노동자를 핍박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무 관심이 없어 보이는 정부,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기에 수고를 아끼지 않는 정부를 향해 힘없는 국민들이 연대하여 항의하고 당신들은 지배자가 아니라 국민의 종복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그래야 변화의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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