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오릉 경릉 전경. [사진제공=궁능유적본부]
서오릉 경릉 전경. [사진제공=궁능유적본부]

[고양신문] 예순에 접어든 내 기억속의 초등학교적 소풍은 푸릇푸릇한 봄소식이었다. 어린 꼬마들이 도시락 가방을 멘 채 나란히 줄지어 걸어간다거나, 잔디밭에 둥그렇게 모여앉아 어머니께서 싸주신 김밥 도시락을 까먹는 그런 풍경이었다. 점심식사 후 실컷 뛰어놀다가 보물찾기와 장기자랑이 펼쳐질 때, 우리의 소풍은 절정에 이른다. 이런 소풍의 단골 장소였던 곳 중에 하나가 서오릉이다. 돌이켜보면,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이 된 ‘서오릉’에서 보물찾기와 장기자랑을 하고 도시락을 까먹을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고양’을 ‘고향’으로 둔 우리들의 특권이 아니었을까?

 서오릉은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로 할 때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눠 볼 수가 있다. 한 그룹은 조선 제7대 왕인 세조(수양대군) 아들들의 왕릉군(群)이고 나머지 하나는 제19대 왕 숙종과 그의 여인들의 왕릉군(群)이다. 

  첫 번째 그룹인 세조 아들들의 왕릉군은 서오릉 조성의 역사와 함께 한다. 
시기는 세조 3년(14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계유정란을 통해 왕위에 오른 세조는 즉위(1455년)와 함께 첫째 아들 도원군을 의경세자(懿敬世子)로 책봉한다. 그런데 조카 단종을 포함해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인 죗값인지 총명하던 의경세자가 원인 모를 병으로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한다. 세조는 자신의 업보로 큰아들이 죽은 것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으로 지관(地官)을 대동하고 직접 여러 곳의 묏자리를 찾아 나선다. 그중에서 가장 길지로 선정된 곳이 지금의 서오릉 경릉이다. 의경세자는 죽을 때 왕이 아닌 세자의 신분이었기에, 그의 묘는 의묘(懿墓)로 조성되었다가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한 뒤 덕종으로 추존되고 의묘는 경릉으로 승격한다.  

  세조에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가 둘째 아들 예종이다. 세조에게 있어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둘째 아들 예종 역시 스무 살에 요절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죽었다는 것이다. 예종은 재위 1년 2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죽어 형의 곁인 창릉에 묻힌다. 예종에 이어 조선 제9대 왕으로 즉위한 성종은 직전 왕이자 작은 아버지인 예종의 창릉과 아버지의 경릉을 조성하고 고양현을 고양군으로 승격한다. 

인원왕후 능침에서 본 서오릉 명릉. [사진제공=궁능유적본부]
인원왕후 능침에서 본 서오릉 명릉. [사진제공=궁능유적본부]

 두 번째 그룹인 숙종과 그 여인들의 왕릉군은 그야말로 아직도 진행 중인 한 편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제19대 왕인 숙종은 강력한 왕권의 확립과 대동법의 확대 실시, 상평통보의 유통, 북한산성의 축조 등 많은 치적에도 불구하고 그보다는 장희빈과 인현왕후로 대변되는 궁중 암투의 조연으로 더 자주 등장한다. 숙종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수렴청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친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극심했던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 당쟁의 한가운데서도 막강한 왕권을 행사한다. 그는 경신환국(1680년), 기사환국(1689년), 갑술환국(1694년) 등 세 차례의 커다란 환국을 통해 서인에서 남인으로, 남인에서 다시 서인으로 집권 세력을 바꾸어가며 어느 한 세력의 독주를 견제한다. 그런데 이러한 환국정치의 이면에는 해당 정파가 내세운 여인들이 등장하는데 서인의 인현왕후와 남인의 장희빈이 그들이다. 

  숙종의 첫 번째 비는 인경왕후 김씨다. 그녀는 열세 살에 왕비가 됐지만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천연두로 세상을 떠나 서오릉 익릉에 묻힌다. 인현왕후 민씨는 인경왕후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681년에 숙종의 두 번째 부인으로 궁에 들어온다.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고 하지만 왕자를 낳은 후궁 장희빈에게 숙종의 총애를 빼앗긴다. 게다가 장희빈이 낳은 왕자(훗날 경종)의 세자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한 기사환국의 영향으로 폐서인되어 안국동 본가로 쫓겨난다. 인현왕후의 빈자리는 결국 장희빈이 차지해 후궁 출신의 중전이 된다. 

  장희빈은 과거 사극의 대표적인 주인공이었다. 배역만 봐도 김지미, 윤여정, 이미숙, 전인화, 김혜수, 김태희 등 당시를 대표하는 여배우만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만큼 뛰어난 미모와 극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장희빈의 중전 생활은 5년 만에 막을 내린다. 숙종은 인현왕후에 대한 미안함과 장희빈에 대한 싫증, 남인에 대한 견제를 염두에 두고 갑술환국을 단행,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장희빈을 중전에서 다시 빈으로 강등한다. 이어 신당(神堂)을 차리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무고의 옥’이 발생해 장희빈을 사사(賜死)한다. 중전으로 복위한 인현왕후도 줄곧 병치레를 하다가 3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숙종은 안타까운 마음에 인경왕후의 익릉 근처에 인현왕후의 장지를 정하고 손수 명릉이라는 능호를 내린다. 그리고 자신도 그곳에 함께 묻어줄 것을 지시한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명릉 오른쪽(바라보는 방향에서 왼쪽)으로는 숙종의 세 번째 부인인 인원왕후의 능침까지 조성되어 지금 서오릉 경내에는 숙종과 왕비 세 사람의 능침이 오순도순 모여있다. 여기에 1970년 경기도 광주시에 있던 장희빈의 대빈묘마저 서오릉으로 이장되어 숙종의 여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다시금 숙종을 둘러싸고 여인들 사이의 궁중 암투 2라운드가 펼쳐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못 궁금해진다. 서오릉 경내에는 숙종의 며느리이자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의 홍릉도 있어 서오릉 두 번째 그룹의 마침표를 찍는다.

  서오릉에는 창릉(예종과 안순왕후), 경릉(덕종과 소혜왕후), 익릉(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명릉(숙종과 인현왕후·인원왕후), 홍릉(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대빈묘(장희빈) 외에도 사도세자의 친모인 영빈이씨의 수경원, 명종의 첫째 아들인 순회세자의 순창원 등도 함께 있어 아직 끝나지 않은 드라마에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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