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 백병원 이원로 원장

젊어선 문학도… 시집 3권 내
“첨단시대도 청진기는 필수”

 "의사는 다른 어떤 직업보다도 냉철함을 요구합니다. 생과 사의 기로에서 정확한 판단을 하려면 늘 감성보다는 이성의 힘에 기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의사들이 좀 딱딱하고 차가워 보이는 것은 아마 이런 직업적 여건 때문일 것입니다."

이원로 일산백병원 원장은 의사이면서 시인이다. 한의원을 운영했던 아버지의 권유로 일찌감치 의사의 길을 결정했지만 그가 정작 서울의대에 입학했을 때 가장 절실하게 다가온 것은 문학 이었다. 당시만 해도 의대는 예과가 있어 본격적인 의술을 익히기 전에 문학과 철학 예술에 대한 폭넓은 학문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입시 공부밖에 몰랐던 청년은 새로운 영역의 학문들에 매료돼 마치 스폰지가 물을 흡수하듯 흠뻑 감성을 빨아들였다. 대학신문에 줄기차게 글을 쓰는 청년 문학도였던 그는 예과 2년간 습득한 문학과 철학이 의사이면서 시를 쓸 수 있는 소중한 근간이 되었다고 회상한다.

서울의대 교수를 역임한 이 원장은 75년 미국으로 건너가 학문과 진료에 정진하며 심장혈관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어 돌아왔다. 23년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도 문학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이 원장은 워싱턴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등 바쁜 시간을 쪼개 문학적 교감을 지속시켰고 1998년 월간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빛과 소리를 넘어’ ‘햇빛 유난한 날엷 ‘청진기와 망원경’ 등 등단 이후 잇따라 출간한 세 권의 시집에서 그는 의사이자 과학자, 시인으로서 쌓아온 뛰어난 통찰력과 감성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분석적 두뇌와 풍부한 상상의 언어가 동시에 결합해 만들어 낸 그의 시는 간결하고 명쾌하다. 삶과 죽음 사이의 찰나를 수없이 확인한 그는 ‘ 겨울이 가야 봄이 오듯 죽어야 다시 산다’ 고 쓴다.

‘몸과 마음을 잇는 줄이 허공에서 끊긴’ 임종 앞에서 그는 ‘싸늘한 몸과 빛나는 혼’을 동시에 보는 눈을 가졌으니 구도자의 해탈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진다. 다만 그는 누군가를 떠나 보낼 때마다 슬픔을 감추지 않는다. ‘심장의 박동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손끝으로 느끼면서도 고쳐주지 못하는 것이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고백한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청진기를 대는 시인의 손에 마지막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몹시 행복해 보인다.

이원장의 시와 의술은 철저히 기독교적 사랑 위에 놓여있다. 몸을 고치는 의사와 혼을 깨우는 시인의 간극은 종교적 철학 안에서 완전하게 사라지고 합일을 이룬다. 아름답고 간결한 특유의 시어들은 읽는 이들을 아주 쉽게 시인의 세계로 안내하며 고된 수행의 과정 없이 담담하게 삶과 죽음, 생성과 소명의 진리를 인식하게 한다.

“의사들에게 감성은 이성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극도의 긴장 속에서 감성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기 쉽지만 좀 고통스럽더라도 감성을 안고 가야 합니다. 가다 보면 감성과 이성이 하나 되는 길을 찾게 되고 보다 온전한 의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원장은 첨단 의학기기들이 개발되면서 청진기를 멀리하는 경향을 안타까워한다. 의사와 환자가 만날 수 있는 감성의 통로이기도 한 청진기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준다. 그래서 그는 의사들에게 청진기를 놓지 말 것을 권유한다. 청진기에 마음을 담아 확인하는 환자의 몸은 기계가 느낄 수 없는 영역임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원로 원장은 일산 사람이다. 호수공원과 정발산, 미관광장, 그리고 그 문화 안으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좋아서 일산으로 이사 왔다고 한다. 세계적 명문의대 조지타운 의과대학에서 교수를 했고 국내에선 서울대 교수와 삼성의료원 심장혈관센터 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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