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물이 들어온 마을
이곳 주교동(舟橋洞)을 인근의 마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배다리라고 불러왔는데 이 이름은 배주(舟) 자와 다리교(橋) 자 한자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이 명칭의 유래에 의하면 예전에 이곳까지 큰물이 들어와 배를 이용한 주교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우리 고양지역은 1925년 을축년에 한강이 범람하는 큰 홍수를 겪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난지도로부터 시작하여 파주의 심악산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한강제방 대보뚝이 만들어 졌다. 

이 제방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이곳 주교동에 한강의 물이 대장천 등을 따라 들어왔고 마을 사람들은 서울로 가는 길목에 작은 배를 연결하여 주교를 놓았으니 이 마을 이름이 자연스럽게 배다리 마을이 된 것이다.

실제로 1990년 한강 제방 붕괴시에 이곳 주교동의 초입인 소방서 아래 하천까지 물이 들어오기도 하였다. 또한 원당지역 택지개발 사업이 이루어진 1980년대 중반에 곳곳에서 갯벌의 흔적인 토탄층을 여러 곳에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1755년 영조년간에는 원당면 이패리로 표기
 고양지역의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는 1755년 이석희편 고양군지를 보면 이곳 주교동은 원당면 이패리에 속해 있는 자연촌락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패리에는 총 103호(戶)가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박재궁촌, 주교촌, 이잉곡 (이작골) 3개 마을이 지금의 주교동에 속한 마을이 된다.  이 마을 중에는 모두 옛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나 이잉곡 즉 이작골 마을은 도시화 개발로 인해 자연촌락 마을이 사라진 상태이다.

이외에 이곳 주교동에는 중면에서 들어온 독곶이를 비롯하여 원당중학교 뒷편의 영글이, 시청 부근의 넘말, 박씨 재실과 묘가 있는 능골, 개발된 마을 마상골, 양조장 부근의 왕게산과 장터거리 등 작은 지명이 곳곳에 남아 있다.

병풍바위 전설과 단종을 거둔 충신 박충원
 이곳 주교동에는 예전부터 차돌봉, 백석봉 부근에 자리한 밀양박씨 선산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본래 왕릉을 만들려다가 골짜기 하나가 부족해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설부터 병풍바위와 박씨가문의 흥망성쇠, 그리고 차돌봉의 흰학의 전설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야기가 이곳 주교동에 전해지고 있다.

이밖에 능골에 있는 고양시 향토유적 제26호인 박충원(朴忠元)선생의 묘소와 신도비는 우수한 문화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문경공 박충원은 조선조 중기의 문신으로 강원도 영월의 장릉(단종릉)을 조성한 충신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 일대에는 이 명문가문의 묘소 수 십기가 자리해 있어 오랜 역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오래된 고가(古家)와 시청이 있는 중심마을
주교동에서는 여러 마을 모습을 볼 수 있다. 먼저 박재궁과 독곶이 마을에는 한옥의 고가를 볼 수 있고 원당초교 인근에는 고층의 아파트와 빌라를 그리고 시청 부근에는 관공서와 상가가 들어서 있다. 마을 앞으로 교외선과 의정부, 서울, 능곡, 일산 등지를 연결하는 도로들이 이곳 주교동을 지나고 있어 교통의 요지가 되고 있다.

아울러 마을 윗쪽에는 임금이 마셨다는 대궐고개 약수가 있고 영글이 마을에는 조선조 전기의 인물인 단산부원군 이무 선생의 묘소가 자리해 있다.

앞으로 2006년 원당중학교 부근에 외곽순환도로의 나들목이 생기게 되면 이곳 주교동은 개발제한구역 해제와 함께 매우 큰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1960년대 초 서울 을지로에서 이곳으로 시청이 이전된 뒤 큰 변화가 있었으나 2000년대 중반 새로운 도약과 발전으로 진정한 고양의 중심 마을이 되길 간절히 기원해 본다.

<고양시청 전문직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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