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동은 고양시청이 있는 원당에서 일산방향에 자리한 마을로 주교동과는 바로 이웃하고 있다. 마을의 북동쪽으로는 견달산이 있는데 보는 방향에 따라 여러 모습을 하고 있는 명산이다. 이 산은 식사동에서는 주산(主山)으로, 문봉동에서는 안산(案山)으로 삼고 있다.

마을은 자연촌락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다가 일부가 1980년대부터 공장 등으로 바뀌었고 1990년대에 들어 더욱 가속화되어 현재는 아파트 단지, 공장단지, 자연촌락 마을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식사동에는 오래전부터 불리어 오는 마을의 고유한 이름들이 있다. 먼저 현재 공장이 많이 들어서 있는 어침이 마을은 흔히 어침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곳을 어침이라 부르는 것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고려 공양왕이 하루를 주무시고(御寢) 지금의 원당동 왕릉골에서 돌아가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어침이의 북동쪽에 있는 마을 번달은 견달산에서 시작된 마을 이름인데 견달을 달리 번달이라 불러 마을이름이 되었다. 이곳을 현달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오룡동은 이곳에 모두 다섯 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도로를 넘어 일산 백석동 방향에 있는 마을이 영심이 마을이다. 이곳은 1755년 기록에 영수미촌(英水味村)이란 기록을 보아 영수미촌이 영심이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동거리는 도촌천 주변에 있는 마을로 동뚝 부근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방아고개는 예전에 이곳에 방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마을의 생긴 모양이 방아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끝으로 능안골은 평산신씨 묘소 안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식사동에는 유난히 고려 공양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곳곳에 있다. 먼저 식사동에 대한 지명유래를 알아보면 공양왕이 이곳 부근 마을에 숨어 있을 때 마을에 있던 절에서 매일 밥을 해 주어 이 마을을 밥절로 부르다가 이것이 식사동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밥을 해준 절은 현재의 견달산 아래라 하는데 이곳의 지명이 부처골, 절골인 점을 보아 그 신빙성을 더욱 높혀 주고 있다.

식사동에는 오래전 부터 토박이 성씨를 이뤘던 집성촌 마을이 몇 곳 남아 있다. 지금은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었지만 지금도 곳곳에서 그 흔적을 살펴 볼 수 있다.

오룡동과 영심이 마을에는 인동장씨, 방아고개에는 전주이씨와 경주정씨, 그리고 어침이 마을에는 경주정씨, 번달 마을에는 전주이씨, 능안골 마을에는 평산신씨 성을 가진 주민들이 오랫동안 거주하고 있는 토박이 성씨이다.

식사동은 조선조 후기까지 현재의 성석동 일대와 함께 고양군 구이동면(九耳洞面)에 속해 있었다. 조선조 영조년간(1755)에 기록되어 있는 당시 이곳 식사동의 호수는 총 86호(戶)로 표기되어 있다.

그후 구이동면이 없어지면서 식사동은 원당면에 속하였고 성석동은 벽제면에 속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식사동은 원당농협과 같은 기관에 속하는 등 원당지역의 중심마을로 남아 있다가 1996년 고양시의 구청체제출범과 함께 원당지역에서 유일하게 일산구에 포함되게 되었다.

(고양시청 문화재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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