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적 신문은 일본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결과 한반도에서 발행된 최초의 신문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들에 의해 발행되었다. 부산의 일본인 상법 회의소는 한성순보보다 1년 10개월이나 앞선 1881년 12월 조선신보를 발행했다.

구한말 독립신문이나 황성신문 등 국민계몽과 여론형성을 위한 신문 발행이 활발했지만, 한일 합방과 더불어 한국언론의 맥은 끊기고 말았다. 일제의 무단통치에도 불구하고 주권을 되찾으려는 민족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3.1운동 지도자들은 독립선언서와 함께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했다. ‘조선독립신문’외에도 50여종의 신문들이 전국각지에서 비밀리에 발행되었지만 대부분 총독부에 의해 압수되고, 발행인들은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독립신문’의 정신은 이어지지 못했다.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등의 발행을 허용했다.

세 신문 모두 서울에서 발행을 했고, 언론사주들은 친일유력자들로 구성했다. 부산, 대구, 목포 등 전국 대도시에서도 일간신문이 발행되었지만, 모두 일본인들이 발행하는 신문이었다. 해방과 더불어 전국 각 지방도시에서 잇달아 신문이 발행되었다.

그러나 미 군정청은 일도일지 원칙에 따라 각 도청소재지에서 발행되던 일본어 지방지들은 친미우익적 성향의 인사들에게 불하되었고, 지방신문은 보수우익 성향의 상업적 언론으로서 정치권력에 취약한 언론자본이 되고 말았다. 4·19 혁명과 더불어 지역언론도 반짝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5·16 군사정권은 언론통제를 위해 신문의 숫자를 크게 줄였다. 쿠데타 일주일만에 전국 916개의 언론사 가운데 약 91퍼센트에 달하는 834개가 등록 취소되었다. 언론사의 숫자를 원천적으로 제한하는 권력의 언론규제는 1980년대 말 군사정권이 물러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군사정권은 생존을 허용한 언론에게는 은행 융자 등 각종 특혜를 부여함으로써, 장기집권을 하는데 필요한 정보차단과 여론왜곡을 유도했다.

한편 신문사들은 신문협회를 결성하고 가격 및 지면 카르텔 등 시장 담합을 통한 이윤극대화에 매진했다. 1980~1987년 간 4대지의 연평균 매출액 성장률은 약 18%로 GNP 성장률의 두 배에 달했다. 1987년 6월 항쟁이후 군사정권이 퇴각하고 언론의 자유가 다시 보장되기 시작하면서 지역신문의 숫자가 다시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일제와 군사정권하에서 자본과 시장과 기술을 축적한 중앙언론의 경쟁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그 결과 군사독재정권의 언론탄압은 사실상 사라졌지만, 지역주민들의 알권리는 여전히 외면당하는 언론의 종속, 소외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지역언론의 규제를 통해 소수 기득권 중앙언론에게 엄청난 특혜를 제공해 온 정부는 지역언론을 다시 일으켜 세울 책임이 있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은 신중해야 한다. 자칫 권력과 언론의 상호결탁으로 변질되거나, 건전한 시장경쟁 체제를 왜곡시키고, 지역언론의 경쟁력을 더욱 저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언론에 대한 제도적 지원은 다음과 같은 개혁을 전제로 시행되어야 한다.

첫째, 건강한 지역언론에 한해 지원해야 할 것이다. 둘째, 지역언론의 경쟁력 향상을 위한 지원이 되어야한다. 셋째, 주간지역신문과 같은 약소언론을 우선 지원해야 한다. 넷째, 지원방법과 절차와 내용이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지역언론 개혁의 궁극적 목표는 언론자유의 신장이다. 한국에서 지역언론이 뿌리내리지 못한 주된 이유는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지역언론을 규제하고 탄압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권력과 결탁한 거대 중앙언론만이 실질적인 언론의 자유를 누려왔다.

한국사회가 민주화되고 분권화되려면 지역신문과 같은 작은 언론에게도 중앙언론과 같은 동등한 언론의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여기에 필수적인 것이 지역언론이다. 결국 지역언론에 대한 지원의 수혜자는 국민 모두인 것이다.

장호순(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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