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이것이 급하다

고양땅 고봉산 자락에 자리 잡고 산지 어느새 10년이 넘었다. 고양시에서 사람들의 눈길이 많이 쏠리는 곳은 대개 신도시 쪽이지만 문화감각이나 역사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관심을 가져야 할 곳은 다른 데 있다. 

그곳은 바로 구 일산에 있는 문봉동이다. 구일산에서 벽제사이의 널찍한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문봉동은 아직 농촌풍경을 간직한 문화적으로 유서 깊은 고장이다.

고양 8현(八賢)을 모신 문봉서원이 있던 곳이다. 숙종 때 세워진 이 서원은 사액(賜額. 임금의 친필로 액자를 내리는 것)이 되었으나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정책으로 깡그리 없어졌던 것이다.

대원군은 당시 전국 7백여 서원중 6백여 개소를 철폐했는데 서원의 작폐가 심했다고는 하나 이 고장을 위해서는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문봉서원의 8현을 우선 출생 순으로 간략하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남효온(南孝溫). 단종~성종. 학문과 절의(節義)에 힘쓰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나중 이조판서가 증직되었다.

▷김정국(金正國). 성종~중종. 경상감사와 예조판서를 지낸 안국(安國)의 동생이다. 황해감사로 있을 때 기묘(己卯) 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나중 재기용돼 예조참판에 올랐다. 향촌 교화에 힘썼다.

▷기준(奇遵). 성종~ 중종. 조광조의 동지로 개혁정치를 추진하다 기묘년에 화를 입었다. 홍문관 직제학을 지냈다.

▷정지운(鄭之雲). 중종~광해. 김정국에 사사(師事)했으며 예조판서가 증직되었다.
▷민순(閔純). 중종~선조. 서경덕의 문인으로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홍리상(洪履祥). 명종~광해. 임진왜란 때 임금을 호종했고 대사헌과 참판을 지냈다.

▷이신의(李愼儀). 명종~현종. 형조참판을 지냈다.
▷이유겸(李有謙). 선조~현종.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참의에 이르렀다.이들은 대개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등의 학풍을 이은 사림(士林) 출신들로서 도의정치를 지지하거나 벼슬을 외면하고 학문과 수도(修道)에 전념하였다.

성리학을 탐구하면서 도의정치를 이상으로 삼았고 향촌에 유교적 질서를 펴는데 애를 썼던 것이다. 서원에는 여러 유형이 있었는데 가문을 빛낸 조상을 모시고 정치적인 세력의 근거같은 것으로 삼은 경우, 순수한 선현(先賢) 거유(巨儒)를 섬기고 숭상한 경우, 그 밖의 그 고장 출신이거나 인연이 있는 현인들 여럿을 함께 뫼시는 경우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문봉서원은 아마도 셋째 유형에 들 것으로 후학들이 중심이 돼 힘을 모아 세웠을 것이다. 어떻든 서원에 봉안된다는 것은 대단한 명예이며 그 같은 명예에 합당한 분을 신중하게 고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양은 개성과 서울의 중간에 위치하며 고려 때부터 선비와 관인(官人)이 많이 살고 또 문화적인 교류가 활발했다. 특히 문봉서원이 있는 고봉산은 고양의 주산(主山)으로 고양 8현에 들어가는 추만 정지운 선생과 모당 홍리상 선생의 묘가 있어 더욱 서원의 복원을 절실하게 한다.

근래 각지에 서원 복원운동이 일고 있다. 비단 후손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유산을 복구 보존한다는 뜻에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고양 8현을 모셨던 고양 땅은 강직한 선비의 고장으로 문봉서원의 복구에 행정당국은 물론, 후손되시는 분들과 뜻있는 분들이 좀더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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