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역대 고양시 총선·국회의원 톺아보기①
▶1978년 10대 총선 ▶1981년 11대 총선

[고양신문] 22대 국회의원선거가 70일 앞으로 다가왔다. 정당별 경선을 거쳐 본선에 진출한 후보들의 윤곽이 드러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본지는 ‘지금’의 정치 속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과거’의 정치를 되짚어보려 한다. 
지체된 농촌지역에서 108만 특례시로 성장하기까지 고양에서의 총선이 어떤 국면에서 치러졌는지. 그리고 어느 정당의 어떤 인물들이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았는지를 개괄적으로 살펴볼 계획이다.  
시기는 1978년 제10대 총선부터 2020년 21대 총선까지로 잡았고, 두 번의 총선을 한 회로 묶어 6회차 시리즈로 싣는다. 역동적으로 요동쳐온 대한민국과 고양 땅의 ‘총선 아카이브’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제10대 총선(1978년) - 오홍석(신민당, 초선) 김유탁(공화당, 4선) 

직선+간선, 유신정권의 기형적 선거제도
고양군, 김포·강화와 한 선거구로 묶여
고양 맹주 김유탁, 소 지역주의 밀려 2위

10월 유신을 통해 장기집권을 도모했던 박정희 대통령. 
10월 유신을 통해 장기집권을 도모했던 박정희 대통령. 

제10대 국회의원 선거는 1978년 12월에 치러졌다. 46년 전에 치러진 10대 국회의원선거를 시작점으로 잡은 이유는 ‘유신정권’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박정희 대통령 집권 2기인 대한민국 제4공화국 체제에서 치러진 마지막 선거이기 때문이다. 반세기 동안 변모해온 국회의원 선거제도, 그리고 고양지역 정치인들의 명멸을 파악하는 출발점으로 맞춤하다. 

유신헌법 국회의원제도의 특징은 직선제와 간선제를 병행했다는 점이다. 목적은 자명했다. 민주국가의 형식을 갖추기 위해 154석 지역구 선거는 직선제로 치렀지만, 간접선거로 뽑히는 77명의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들은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명목상 국가최고기관을 통해 선출되도록 해서 집권여당이 무조건 1당을 차지하도록 한 것이다. 

유신체제를 뒷받침했던 장치인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 주로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졌다. 
유신체제를 뒷받침했던 장치인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 주로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졌다. 

지역구 선거는 한 선거구에서 2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였다. 이 역시 여당인 민주공화당(공화당)의 당선확률을 높이려는 전략의 산물이다. 친여 성향의 농촌지역에서는 집권여당이 2석을 다 차지하고, 상대적으로 야당세가 강한 도시 지역에서도 최소 1석을 차지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의원 숫자는 231명이었고 임기는 6년으로, 지금 기준으로는 상당히 길어 보인다. 물론 한 해 뒤 박 대통령의 서거에 이은 신군부 등장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10대 국회의원 임기는 중도에 단절된다. 

10대 총선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면, 박정희 정권은 유신2기의 통치동력을 얻기 위해 선거에서의 압승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공화당 고전, 신민당 선전, 무소속 돌풍’이었다. 야당인 신민당이 잘해서가 아니었다. 당권 다툼에 몰두하며 타락상을 보였던 신민당도 유권자들의 질타를 받았지만, 민주주의를 외면하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거부감이 훨씬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제1야당인 신민당의 로고. 
박정희 정권 시절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제1야당인 신민당의 로고. 

이제 고양시 선거를 살펴보자. 당시 경기도 7선거구에 속했던 고양군은 김포군·강화군과 함께 하나의 선거구로 묶였다. 총선에는 무소속 4명을 포함해 7명의 후보가 나섰고, 1위는 신민당 오홍석, 2위는 공화당 김유탁 후보가 금배지의 주인공이 됐다. 

당시 고양군은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다. 70년대 이후 지속된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의 영향으로 서울과 인접한 고양군 인구도 꾸준히 증가해 1978년에는 시 승격 요건을 넘어서고도 남는 15만명에 달했다. 하지만 6개 읍소재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그린벨트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인 탓에 개발에서 비껴났고, 군사분계선과 가까운 접경지역 특성상 유권자 대부분이 정치적으로 강고한 보수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고양·김포·강화에서 야당후보가 1등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많은 유권자들이 ‘우리동네 사람’에게 투표를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고양을 기반으로 한 김유탁 후보가 김포·강화를 기반으로 하는 오홍석 후보를 앞서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러한 소 지역주의 투표 성향은 여러 지역을 하나의 선거구로 묶는 중선거구제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제10대 총선 '고양·김포·강화' 선거구에서 동반 당선된 김유탁(공화당), 오홍석(신민당) 국회의원. 
제10대 총선 '고양·김포·강화' 선거구에서 동반 당선된 김유탁(공화당), 오홍석(신민당) 국회의원. 

김유탁 의원은 1980년대 이전 고양군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고양군 출신은 아니고,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실향민이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육사 교수로 재임했던 그는 5·16 이후 공화당 창당과 동시에 정계에 입문해 7대 전국구 초선의원에 당선됐고, 공화당 고양군 지구당위원장으로서 내리 4선을 한 정치 엘리트였다. 

10대 총선에서 김유탁 후보는 ‘공화당 다시 밀어 쉬지 말고 전진하자’를 구호로 내걸었다. 또한 20개가 넘는 공약을 내걸었는데 대부분이 김포·강화 유권자들을 겨냥한 내용들이고, 고양군과 관련한 공약은 △송포-김포 간 교량 가설 △일산역 구내육교 가설 등 딱 2개뿐이다. 선거 전략상 고양 유권자들을 집토끼로 봤던 것 같다. 공약 중 송포-김포 간 교량 가설은 30년이 지난 2008년이 되어서야 ‘일산대교 개통’으로 실현된다.  

그의 마지막 직책은 국회 예결위원장이었지만, 10·26이 터지고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김유탁 의원은 정치행위 금지로 묶이게 된다.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이다.  
 

❚제11대 총선(1981년) - 이용호(민정당, 초선) 이영준(민한당, 초선)

관제 야당 들러리 세운 엉터리 민주선거
고양군·파주군에서 2인 뽑는 중선거구제
파주 출신 동갑내기끼리 사이좋게 1·2위 

신군부를 앞세워 시국을 장악하고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전두환 대통령. 
신군부를 앞세워 시국을 장악하고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전두환 대통령. 

군사쿠데타에 성공한 전두환 계엄사령관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이른바 ‘체육관선거’를 거쳐 대통령에 취임한다. 신군부에 의한 제5공화국이 열린 것이다. 1981년 3월, 대통령 취임 한 달 만에 새롭게 개정된 헌법에 의해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살펴보면 1개 선거구에서 2명의 당선자를 뽑는 중선거구제는 유지됐고, 의원수는 276석으로 늘었다. 또한 지역구에서 의석수 1등을 차지한 정당이 92석에 달하는 전국구 의석 중 3분의 2를 차지한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형식적으로 보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다수의 관선 의원을 뽑던 유신시대보다는 조금 나아진 듯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공화당과 신민당을 가리지 않고 기존 정치인 대부분을 정치활동 금지 대상으로 묶어버렸기 때문이다. 과거를 모두 싸잡아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몰아붙이며, 새로운 지도력을 중심으로 ‘국정 안정’을 설파한 신군부의 프로파간다는 일사천리로 확산됐다.   

신군부의 행보에 적극 동조하는 새로운 인사들을 규합해 만든 여당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정의당(민정당)’이었다. 하지만 여당만 가지고 민주주의 국가 흉내를 낼 수는 없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 문제를 말 잘 듣는 야당을 직접 만드는 방법으로 해결해버렸다. 그렇게 탄생한 이른바 관제 야당이 바로 민주한국당(민한당), 한국국민당(국민당) 등이었다. 

(왼쪽부터) 5공화국 시절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과 관제 야당인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로고.
(왼쪽부터) 5공화국 시절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과 관제 야당인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로고.

두 관제야당에는 각각 신민당과 공화당에서 활동했던 정치인들 중 정치활동 금지를 당하지 않은 ‘순한 맛’ 인사들이 대거 참여해 야당 코스프레를 하며 총선을 치렀다. 선거결과는 민정당이 151석을 차지했고, 급조된 야당들 중 1명 이상의 당선자를 배출한 야당도 무려 7개나 됐다. 당시 야당 후보들의 선거공보물을 보면 ‘5공화국의 평화적 정권교체’ ‘5공화국의 기둥’ 등 여당인지 야당인지 모를 표현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후 민한당과 국민당은 각각 민정당 2중대, 3중대로 불리며 신군부 정권의 들러리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러한 과정과 결과는 다당제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적 선거제도에 대한 우롱이었다. 때문에 11대 총선은 한국 민주주의 최대의 흑역사로 평가된다. 

11대 총선에서 금배지의 주인공이 된 이용호(민정당), 이영준(민한당) 의원. 둘 다 파주 출신 48세 동갑내기였다.
11대 총선에서 금배지의 주인공이 된 이용호(민정당), 이영준(민한당) 의원. 둘 다 파주 출신 48세 동갑내기였다.

11대 선거에서는 고양군과 파주군이 하나의 선거구로 묶였다. 모두 6명의 후보자가 등록했고 1위 민정당 이용호 후보, 2위 민한당 이영준 후보가 당선됐다.

당시 고양과 파주는 16만~17만명의 인구를 가진 비슷한 규모의 도시였다. 하지만 국회의원 두 명은 모두 파주 출신이었다. 고양군 출신인 국민당 이택석, 민권당 이교성 후보는 3위와 6위를 차지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당락을 가른 가장 큰 요인은 소속 정당이었다. 5공 정권 초기의 위세에 힘입어 민정당+민한당 동반 당선이라는 11대 총선의 전국적 경향이 고양·파주에서도 고스란히 구현된 것이다. 

파주 법원리에서 성장해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민정당 이용호 의원은 협진양행, 한일산업 등을 경영하며 당대의 시대적 과제였던 ‘수출증대’에 기여했던 기업인 출신이다. 이 의원은 총선 구호로 ‘대통령 일하게 민정당에 투표하자’를 내걸었다. 공약으로는 △경의선 복선·전철화 △임진강 주변 관광지 개발 △경공업단지 개발 △전문대학 유치 등을 제시했다. 이중 규제에 묶인 현실을 감안해 어정쩡한 개발 계획들을 끼워 넣은 느낌이다. 공약 중 경의선 전철화는 28년 후인 2009년에 실현됐다. 

민한당 이영준 의원은 기업인이자 파주지역 대표 사학 중 하나인 문산여중·문산종고 재단이사장이었다. 명색이 야당이었던 그는 총선에 도전하며 △최저임금제 도입 △여권신장과 청소년보호 △복지시설 확대 △합리적 세제개혁 △중소기업 육성 등 나름 거시적인 의제들을 정견으로 제시했다. 또한 ‘일당독주 질색이다 야당 찍어 막아내자’라는 구호를 호기롭게 내걸기도 했다. 

총선 당시 나이를 살펴보면, 이용호·이영준 후보가 48세 동갑이고, 이택석 46세, 이교성 42세였다. 신군부에 의한 강제적 인물교체로 인해 40대들이 정치판의 새로운 주인공들로 대거 등장하는 국면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11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택석(국민당), 이교성(민권당) 후보. 둘 다 고양군 출신으로, 훗날 나란히 국회 입성의 꿈을 이룬다. 
11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택석(국민당), 이교성(민권당) 후보. 둘 다 고양군 출신으로, 훗날 나란히 국회 입성의 꿈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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